[데스크 칼럼] 지역 의료 붕괴, 이제 제대로 치료할 때
송지연 정치·사회 파트장
진료권역 폐지·KTX 개통으로 지역 의료 붕괴
서울 빅5 병원 ‘상경 진료’ 일상화로 환자촌까지
부산 중입자가속기 지연은 지역 의료 열악 사례
지금은 지역과 필수 의료 공백 막을 ‘골든타임’
지역민의 이동 편의를 위해 2004년 개통된 KTX 열차는 오히려 지역의 불균형을 심화 시켰다. 주요 자원이 지역에서 수도권으로 이동하는 경향이 그 반대 흐름보다 더욱 거세다. 정부가 지역균형발전을 등한시하는 사이 KTX는 수도권으로 지역 자원을 빨아들이는 파이프 역할을 하고 있다. ‘KTX의 역설’을 가장 잘 보여 주는 분야가 의료계다.
정부가 의료보험증에 표시된 진료권에서만 진료가 가능한 의료보험 진료권 제도를 1998년에 폐지하면서 의료계의 지각변동은 예고됐다. 이후 KTX 개통으로 지역의 ‘상경 진료’ 수요는 폭발적으로 늘었다.
가족이 위중한 병에 걸리면 소위 ‘빅5’로 불리는 서울대병원, 연세의료원, 삼성서울병원, 서울아산병원, 가톨릭의료원부터 알아본다. 지난 5년간 암 치료를 위해 이들 병원을 찾는 비수도권 환자는 100만 명을 넘어 전체 환자의 39%를 차지했다. 이들을 위해 병원 주변이나 병원을 오가는 교통이 편리한 곳의 고시원이나 원룸을 중심으로 ‘지방 환자촌’이 형성되거나, 지역 환자들을 위해 별도의 요양 시설까지 생겼다.
지역에 산다는 이유로 양질의 의료 서비스를 받기 위해서 병원비는 물론이고 교통비와 숙박비를 더 지불해야 하고, 아픈 몸을 이끌고 수도권으로 이동해야 하는 고통도 감수해야 한다.
이런 사정을 감안하면 최근 정부가 지역 의료와 필수 의료 지원 강화 대책을 내놓은 것은 지역민 입장에서 반가운 소식이다.
‘상경 진료’ 받을 형편이 되지 못한 이들은 지역의 붕괴한 의료 시스템의 폐해를 고스란히 겪어야 한다. 농어촌 지역을 중심으로 보건소장 인력난은 새삼스럽지도 않은 풍경이다. 응급실을 찾지 못해 구급차에서 목숨을 잃는 일도 늘고 있다.
부산은 그나마 의대가 다른 지역보다 많은 편이지만, 서울과 비교하면 인프라가 한참 뒤처진다. 단적인 사례가 10년 넘게 꿈에만 그친 기장 중입자가속기 도입이다. 서울의 민간 병원인 세브란스 병원에서는 이미 도입된 같은 종류의 중입자가속기가 부산에서는 추진 10년이 넘도록 착공조차 못 하고 있다. 정부와 관련 기관이 지역 의료 시스템에 관심과 의지를 가졌다면 이렇게까지나 지연될 일인가 싶다.
정부가 의료 혁신을 하겠다고 나선 김에 제대로 해줬으면 한다. 지역 의료와 필수 의료를 살리려면 내실 있는 의사 양성 시스템과 이들의 적절한 배치, 의사 이외 인프라 투자 등이 관건이다.
걱정스러운 것은 정부의 의료 혁신 정책이 ‘의대 정원 확대’ 논의로 물꼬를 튼 점이다.
현장에서는 지금 체제에서 의대 정원이 늘어나면 필수 의료 인력이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수입이 높고 소송 위험이 적은 진료과로 인력이 몰릴 것으로 전망한다. 의대 6년 공부 후 의사면허시험에 통과하면 유명 피부과 클리닉에서 무급으로 1년 정도 배운 후 개원하는 것이 비일비재한 실정이다.
의료계 현장에서는 기피 진료과로 불리는 ‘내외산소(내과·외과·산부인과·소아청소년과)’ 전문의가 되기 위해 의대 6년을 마친 후 5~6년을 더 공부해도 다른 진료과보다 수입은 적고 소송 등 리스크는 더 크다는 푸념이 터져 나온다. 사명감으로 의사가 된 이들이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오랜 시간 살인적인 근무 강도를 견디며 전공의와 전문의 과정을 거쳐봐야, 사명감에 대한 존중은커녕 ‘서비스가 형편없다’는 식의 민원에 일상적으로 시달린다는 이야기다. 이런 구조라면 의대 정원 확대가 곧바로 지역 의사 수 확대로 이어지기는 만무하다. 지역과 필수 의료에 의사들이 근무할 수 있는 환경 조성이 우선이다.
응급실을 전전하다 구급차 안에서 골든타임을 놓치는 일명 ‘응급실 뺑뺑이’만 해도 장기적으로는 응급실 인력 충원이 필요하지만, 예전 1339 시스템처럼 병원과 구급대원 간의 원활한 소통과 컨트롤 체계 구축이 더욱 시급하다.
지역과 필수 의료의 환경 개선은 복합적인 손질이 필요하다. 우수한 의료 인력과 인프라가 지역과 필수 의료에서 구멍이 나지 않도록 유도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의사 수 확대는 그 해결법 중 하나 일 수 있지만, 만병통치약이 되긴 어렵다. 적정 의사 수를 두고 정부와 의료계가 갈등을 빚는 사이 정작 중요한 의료 시스템 개선은 뒷전으로 밀려날까 우려스럽다. 다행히 정부와 의료계가 ‘지역과 필수 의료 공백이 문제’라는 비슷한 진단을 내린 듯하다. 이제 치료를 제대로 할 때다. sjy@busan.com
송지연 기자 sjy@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