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민 되느니 집에 남겠다” 수십만 팔레스타인인 피란 거부
75년 전 쫓겨난 역사 반복 우려
“지금 떠나면 그때처럼 못 돌아와”
가자 북부 주민 “죽더라도 남아”
남부 피란 갔다 다시 돌아오기도
이스라엘군이 가자지구 북부에서 지상전을 예고하며 주민들에게 남쪽으로 대피하라고 통보했지만, 수십만 명의 주민들이 75년 전 이스라엘에 삶의 터전을 빼앗겨 쫓겨났던 역사, ‘나크바’(대재앙)를 반복할 수 없다며 피란을 거부하고 있다.
23일(현지 시간) 미국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가자지구 북부 주민 수십만 명이 피란을 거부하고 집에 남기를 선택하고 있다.
남은 이들 대부분은 1948년 제1차 중동전쟁 당시 팔레스타인인 최소 72만 명이 고향에서 쫓겨나 난민으로 전락했던 나크바가 재현될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가자시티 북부 자발리야에 사는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바질 아부 사다(35)의 증조부는 1948년 지금의 이스라엘 남부 지역에서 살다 강제로 쫓겨나 이곳 북부에 자리 잡았다. 그로부터 75년이 지난 오늘날, 후손들은 두 번째 삶의 터전이 된 자발리야에서도 쫓겨날 상황에 놓였다.
아부 사다의 가족은 떠나지 않기로 했다. 아부 사다는 지금 집을 떠나면 음식과 머물 곳이 없을 뿐 아니라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고 걱정했다. 친척 10명이 이스라엘군의 공습으로 목숨을 잃었지만, 그는 “이제 더 이상 신경 쓰지 않는다”며 “내가 죽게 된다면, 죽겠다”고 말했다.
이들은 남쪽으로 피란을 갔다가 그대로 가자지구 밖으로 추방당해 이집트나 다른 나라를 떠도는 난민 신세로 전락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가자시티에 남기로 한 이야드 쇼바키(45)는 “1948년의 강제 이주도 이런 식으로 시작했다”며 “당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1∼2주만 집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자’고 생각했지만, 절대 다시 돌아가지 못했다”고 말했다.
유엔에 따르면 현재까지 이스라엘과의 분쟁으로 삶의 터전을 잃고 다른 나라로 떠난 팔레스타인 난민과 그 후손들은 600만 명에 달한다. 요르단, 레바논, 시리아 등 근처 중동 국가에 퍼져 있는 이들 대부분은 지금도 제대로 된 일자리나 재산도 없이 ‘이방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가자시티 주민 압달라 하사닌(23)은 “이집트 시나이 반도나 다른 나라에서 난민으로 사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며 “이곳이 우리의 땅”이라고 강조했다.
팔레스타인계 미국인 역사학자 라시드 칼리디는 이처럼 1948년 아크바의 기억이 가자지구 팔레스타인 주민들에게 크게 남아 있다고 말했다.
이스라엘은 이번 대피 통보가 가자지구 주민의 안전을 위한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가자지구 남쪽에 민간인들을 위한 ‘안전지대’를 만들 것이며, 하마스를 몰아내고 나서 가자지구를 점령하지 않겠다는 입장도 밝혔다. 그러나 많은 팔레스타인인은 이런 이스라엘군의 말을 믿지 못하고 자기 집이나 근처 병원, 교회에 남고 있다고 WSJ는 전했다.
가자지구 남부의 불안한 환경도 이들이 피란을 거부하는 이유 중 하나다. 이스라엘은 남부 일대를 안전지대라고 강조하고 있지만 이곳에도 공습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또 피란민 수십만 명이 몰려들어 식수와 식량, 대피소가 극도로 부족해 일부는 다시 북부로 되돌아가기도 한다.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 구호기구의 토마스 화이트 국장은 영국 BBC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집과 생업 등 모든 것을 버리고 남부로 온 피란민들이 하루에 물 1L와 아랍식 빵 한두 장으로 버티고 있으며 “몇몇은 다시 북쪽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이현정 기자 yourfoot@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