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지도자의 연설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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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찰스 3세 국왕이 7일(현지시간) 수도 런던에서 즉위 후 첫 ‘킹스 스피치(king’s speech·의회 연설)’를 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통치하던 시절, 군주의 연설은 ‘퀸스 스피치’였으니 ‘왕의 연설’은 엘리자베스 2세의 아버지 조지 6세 이후 70년 만인 셈이다. 킹스 스피치는 통상 의회 회기 연도의 시작을 알리는 개회사의 의미를 지닌다. 이날 찰스 국왕은 10분간의 연설을 통해 향후 정부의 최우선 과제와 중점 추진 법안에 관해 설명했다고 외신은 전했다.

찰스 국왕의 할아버지 조지 6세는 ‘영화적’ 인물이었다. 어릴 때부터 수줍음이 많았던 그는 일상의 대화에서 말을 더듬는 언어장애인이었다. 즉위 후 증세가 더 심해져 오랫동안 연설 공포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수시로 대중 앞에 나서야 하는 국왕으로서는 치명적인 약점이다. 게다가 그는 왕위를 이을 첫째 아들도 아니었다. 형인 에드워드 8세가 이혼녀와의 사랑을 선택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국왕에 올랐던 것이다.

피나는 노력으로 언어장애를 뛰어넘은 그의 이야기는 영화 ‘킹스 스피치’(2011)로도 만들어졌다. 수많은 군중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말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귀를 기울인 마지막 장면은 특히 감동적이다. 조지 6세의 대국민 연설이 끝나자 마침내 군중들의 열렬한 박수와 환호가 쏟아진다. 장애 극복에 대한 벅찬 상징이겠으나 왕의 연설이 지녀야 할 품격을 보여준 명장면이기도 하다.

말 잘하는 것은 지도자의 중요한 덕목 중 하나로 꼽힌다. 대중의 주목을 받고 지지를 얻으려면 자기 생각과 의지를 잘 전달해야 하므로 당연하다. 그러나 조지 6세의 연설이 역사에 길이 남은 건 단순히 말을 잘해서가 아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이다. 설득의 힘은 화려한 수사와 현학적 태도에 있지 않다. 그 요체는 공감과 진정성이다. 어눌한 말더듬이(조지 6세)는 핸디캡을 통해 타인의 고통을 헤아릴 줄 알았고 절제와 겸손의 자세로 늘 국민들을 생각했다. 언행일치의 삶이 당대 선전선동의 달인(히틀러)을 이긴 비결이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지도자들의 입으로 시선을 돌리면 한숨만 나온다. 삿된 선전술과 웅변의 테크닉만 요란해서다. 좋은 연설이란 길지 않은 간결함 속에 촌철살인의 메시지를 품고 있는 법이다. 국민에 대한 진심이 담긴 언어로 표현될 때 그것은 공감의 빛으로 널리 확산된다. 이 나라 지도자들이 꼭 명심해야 할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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