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화의 크로노토프] 화중지병? 견이불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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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음악 칼럼니스트

한국에 처음 피아노가 들어온 곳은 부산
다른 지자체가 ‘최초’ 내걸고 문화 행사라니
역사적 사실 밝혀 부산 콘텐츠로 만들어야

피아노는 유럽의 음악 문화를 대표하는 악기 중 하나다. 1700년경 피아노의 전신인 하프시코드와 스피넷을 제작하던 이탈리아 악기 장인인 크리스토포리가 발명했다. 다른 악기들에 비해 300년이 조금 넘는 짧은 역사를 가졌지만, 이전 시대에 있던 건반 악기와는 전혀 다른 메커니즘으로 만들어졌고 가장 늦게까지 진화해 왔다. 당시 ‘피아노 포르테’라 불린 새로운 악기는 영국으로 건너가면서 ‘피아노’로 불렸다. 처음에 나온 피아노는 건반이 66개에 불과한 작은 악기였지만, 유럽의 여러 나라로 전해지면서 19세기 중반에 88개의 건반을 갖춘 지금의 피아노가 되었다.

다른 악기의 도움 없이도 독립적으로 풍부한 소리와 다양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피아노는 ‘악기의 왕’으로 불린다. 사적 모임이 잦았던 유럽에서는 새로운 살롱 문화를 만드는 아이콘이 되었다. 1970년대 우리나라에서도 중산층이라면 어느 집이나 피아노를 갖추려고 하는 문화가 형성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가정에서 피아노를 보유하기는 쉽지 않다. 비싸기도 하지만 덩치도 만만치 않은 데다 악기가 내는 소리도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10여 년 전, 필자는 대구지역의 한 기관으로부터 전화 연락을 받았다. 100대의 피아노가 펼치는 콘서트를 기획하고 있는데 연주자로 함께 해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참가하지 못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한국 최초의 피아노 유입지가 대구 사문진 나루터라면서 2012년부터 달성군이 시작한 ‘100대 피아노 콘서트’였다. 이 행사는 달성문화재단이 주관하는 문화 사업의 일환으로 세계에서 유일한 ‘블록버스터 피아노 축제’라는 홍보와 함께 성행 중이다.

현재 국내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피아노는 1911년 독일의 블뤼트너사가 만든 피아노다. 2011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서울 정동에 있는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피아노에 관한 가장 오랜 기록은 1897년 서울과 부산의 영국영사관에서 주최한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 60주년 기념 파티에서 피아노를 연주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부산에는 그보다 앞선 1884년에 영국 부영사로 부임한 34살의 에드워드 파커가 피아노를 소유하고 있었고 관사에서 직접 연주했다는 기록도 있다.

1885년부터 1897년까지 초대 주조선 러시아 공사로 파견된 베베르의 공관에 화려한 그랜드 피아노가 있는 사진 자료도 있다. 〈조선에서 온 편지〉의 저자 로버트 네프는 그의 저서와 기고문 등을 통해 1900년 이전에도 서울에 두어 대 이상의 피아노가 있었으며, 한국 궁궐에도 피아노가 있었음을 밝혔다. 따라서 대구 달성군이 근거로 내세운 미국 선교사 사보담(史保淡·Richard H. Sidebotham)의 아내가 가족에게 보낸 편지 기록은 단순한 과장으로 보인다. 결국 사문진으로 들어간 사보담의 피아노는 한국 최초가 아닌 것이 된다.

물론 새로운 역사 자료가 다시 등장할 수도 있지만, 현재까지 확인한 기록으로는 부산이 한국 최초의 피아노 유입지가 된다. 그런데 달성군은 여전히 ‘최초’를 내걸고 ‘100대 피아노 콘서트’, 뮤지컬 ‘귀신통 납시오’ 등의 문화 행사를 열고, 사문진 나루터에 공원과 조형물까지 조성해 시민들에게 동참하도록 홍보하고 있다. 없는 내용도 부풀려 이야기를 만들어 예술문화 콘텐츠로 활용하는 곳이 있는가 하면, 역사적인 근거가 있음에도 깜깜이로 버려두는 곳도 있다. ‘견이불식(見而不食)’이라는 말도 있지만, 이것은 ‘그림의 떡(畵中之餠)’이 아니다. 제발 있는 것부터 잘 챙기자.

문화와 문명은 물 흐르듯이 전파되는 것이다. 민족국가의 근대성을 강조해 온 미국 문화인류학자 아파두라이는 〈고삐 풀린 현대성〉이라는 책에서 문화의 ‘탈국가론’을 제시했고 문화에는 경계가 없음을 강조했다. 피아노가 서양에서 만들어진 악기라고 해서 우리 문화 속에 들어올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피아노가 한국에 들어와 최초로 연주된 장소가 부산이라면, 그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부산의 사회·문화적 콘텐츠를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한다. 부산 역사를 옛 동래라는 지역으로 한정한다면 과거만 붙잡는 일이 되고 만다.

부산은 한국의 개항과 함께 발전한 도시다. 한국에서 세계로 나가는 문, 세계가 한국으로 들어오는 문이 부산이다. 단순히 서양 악기 하나가 한국으로 들어온 일이라고 치부해 버리기에는 피아노라는 악기가 가진 상징성이 너무 크다. 게다가 문화란 역사를 바탕으로 한 작은 일이 모여야 풍성해진다. 작다면 작은 이런 일들이 제대로 쌓일 때 부산의 문화는 더욱더 발전한다. 지역에서 있었던 역사적인 사실도 제대로 못 챙기면서 건축물만 짓는다고 명품 문화도시가 저절로 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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