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조선왕조실록박물관

임광명 논설위원 kmyim@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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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사고(史庫)는 조선 초기까지 네 군데 있었다. 한양을 비롯해 충주, 성주, 전주였다. 네 곳으로 나눈 것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이는 현명한 대비였다. 임진왜란 때 전주의 사고를 제외하고 모두 소실된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사고를 재건해야 했는데, 예전처럼 허술한 데는 안 된다는 게 조정의 중론이었다. 선조실록에 기록된 표현에 따르면 ‘가파르고 험해 인적이 닿지 않는 곳’이 최우선 조건이었다.

후보지로 여러 곳이 제안돼 채택됐는데, 그중 하나가 강원도 오대산이었다. 당시 오대산은 특히 ‘물·불·바람의 재앙이 침입하지 못하는 길지’로 알려져 있었다. 1606년 드디어 오대산에 사고가 지어져 복간한 실록을 안치했고, 그 수호 사찰로 월정사가 지정됐다. 오대산과 조선왕조실록의 인연은 그렇게 맺어졌다.

그러나 300여 년 뒤 ‘오대산 사고 조선왕조실록’(이하 오대산본)은 간난신고를 겪어야 했다. 1910년 일제에 국권을 상실한 후 오대산본은 이왕직도서관이 관리하다가 조선총독부를 거쳐 1913년 도쿄제국대 도서관에 기증 형식으로 반출됐다. 말이 기증이지 강탈에 다름 아니었다. 강탈해 갔으면 보존이라도 제대로 했어야 하는데,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오대산본은 대부분 소실되고 일부만 남았다. 남은 오대산본이나마 국내로 모두 환수되기까지는 80여 년의 세월이 더 흘러야 했고, 환수 이후에도 오대산본은 본래 있던 데로 돌아가지 못하고 서울의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됐다.

그랬던 오대산본이 마침내 서울이 아닌 오대산, 정확히는 강원도 평창군 월정사 입구에 있는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에서 방문객을 맞게 됐다. 11일 개관식을 가진 조선왕조실록박물관은 오롯이 오대산본을 위한 박물관이다. ‘국립’ 타이틀이 붙은 만큼 국가 예산으로 오대산본을 관리·연구하고 전시한다. 다른 데와는 달리 이곳에선 조선왕조실록 원본을 직접 볼 수 있다.

환수 이후 오대산본이 오대산으로 다시 오기까지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강원도 지역사회가 집요하게 본래 자리에 돌려놓기를 요구했지만 문화재 당국은 관리상의 이유로 불가 입장을 고수했던 것이다. 하지만 당국이 기부채납 형식을 빌려 박물관을 짓기로 함으로써 오대산본은 110여 년 만에 일부나마 제자리에 돌아올 수 있었다. 모름지기 모든 사물은 다 제자리가 있고, 또 그 자리에 있을 때 더욱 빛을 발하는 법이다. 오대산본의 귀환을 멀리서나마 환영하고 응원한다.

임광명 논설위원 kmyim@


임광명 논설위원 kmyim@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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