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반 만에 확인한 가해자 가게, 집에서 30걸음 거리였다[제3자가 된 피해자]

양보원 기자 bogiza@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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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행 당한 직후 곧장 신고
수사 상황·가해자 정보 몰라
열람등사신청으로 겨우 확인
보복 두려움으로 거처 옮겨
“왜 피해자만 모르나” 호소

사진은 부산경찰청 전경. 부산일보DB 사진은 부산경찰청 전경. 부산일보DB


집으로 돌아가는 길, 30대 최혜선(가명) 씨는 일면식 없는 60대 남성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그는 혜선 씨에게 술을 먹이고 정신을 잃은 혜선 씨를 모텔로 데려갔다. 수사기관에선 실질적인 신변 보호를 해주지 않았다. 그가 집 근처에서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재판 마무리 단계에서 직접 열람 등사 신청을 통해서였다.

또다시 피해자는 사건에서 제3자로 밀려났다. 부산 돌려차기 사건, 초량 노래주점 폭행 사건과 똑같은 구조다. 무엇 하나 변하지 않은 피해자 지원 시스템 속에 혜선 씨는 피해자들이 걸어온 길을 그대로 걸을 수밖에 없었다.

■불안의 시간

지난해 6월 13일 오전 6시 31분께 부산 연산동 인근서 혜선 씨는 60대 남성 A 씨를 처음 만났다. A 씨는 술에 취한 혜선 씨를 약 30m 떨어진 식당으로 데려가 술을 더 먹인 후 모텔에서 성폭행했다.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땐 흐트러진 옷가지와 모텔에서 나가는 A 씨의 뒷모습이 보였다. 황급히 모텔에서 나온 혜선 씨는 사건을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 수사와 검찰 조사, 재판의 지난한 과정을 거친 지난 10일, 부산지법 형사6부(부장판사 김태업)는 준강간 혐의로 A 씨에게 징역 3년을 선고했다. 사건 직후 혜선 씨는 경찰에게 수사 상황을 물었다. 가해자는 누구인지, 어디서 뭘 하는 사람인지 알고 싶었다. 그러나 여러 번의 연락에도 끝내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개인정보라 알려줄 수 없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사건 당시 CCTV 영상도 알 수 없었다. 혜선 씨는 “답답한 마음에 피해자가 가면 뭔가 알려주지 않을까 싶어 사건이 일어난 모텔 앞까지 가 봤다”고 말했다.

A 씨는 불구속 상태였다. 혜선 씨는 경찰에 신변 보호를 요청했으나, A 씨의 보복 범죄 가능성이 적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꾸준한 요청 끝에 혜선 씨가 받아낸 보호 조치는 112등록 한 달이었다. 경찰의 신변보호 조치 유형은 112등록, 스마트워치, 맞춤형 순찰, 신변경호, 가해자 경고, 피해자 권고, 신원정보변경, 보호시설연계, 임시숙소 등이 있다. 혜선 씨가 받은 조치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었다.

■가까이 있던 위험

A 씨가 운영하는 가게가 집 근처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사건 이후 약 1년 5개월이 지난 10월 17일 결심공판 때였다. A 씨는 연제구에서 당구장과 노래방을 운영 중인 가장이라며 선처를 호소했다. 불구속 상태인 A 씨가 집 근처에서 보복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법정에서 혜선 씨를 노려보며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던 A 씨의 눈빛이 뇌리에 선했다. 인터넷을 뒤졌지만 연제구에서 운영 중인 당구장과 노래방만 수십 곳에 달했다.

가게의 정확한 주소를 알게 된 건 열람 등사를 신청해 자료를 받은 지난 7일이었다. A 씨가 운영하는 당구장은 혜선 씨가 살던 집 바로 앞, 불과 30걸음 남짓 떨어진 곳에 있었다. 노래방과의 거리도 도보 2분에 불과했다. 지난해 사건을 겪은 후 이사한 집과도 자동차로 10분 거리였다. 혜선 씨는 지난 12일 A 씨를 피해 또다시 급하게 거처를 옮겼다.

사건의 당사자인 피해자지만 가해자의 거취조차 제대로 알 수 없었던 현실에 혜선 씨는 가슴을 내리쳤다.

그는 “가해자의 인권과 개인정보도 중요하지만 이렇게 가까이에 살고 있다면 왜 미리 알려주지 않았는지, 신변 보호를 위한 스마트 워치는 왜 지급되지 않았는지 의문”이라며 “사건 내용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피해자가 답답함과 두려움을 느끼며 도망치는 일은 더 이상 일어나선 안 된다”고 말했다.



양보원 기자 bogiza@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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