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맹탕 연금개혁안'… 대통령이 나서야

김길수 기자 kks66@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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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 종합운영계획안 핵심 없어
인구 줄면서 국민연금은 고갈 불 보듯
갈등 속 개혁 성공한 프랑스 사례 주목
지도자의 결단·추진의지가 가장 중요

기자가 직장생활을 시작한 1992년 무렵에는 일부 사원들이 매달 현금을 갹출해 부서 기금을 모았다.

이 돈은 부서의 각종 행사경비와 경조사비는 물론, 퇴직하는 선배의 위로금으로 지급됐다. 그 당시만 해도 해마다 신입직원이 들어왔기 때문에 선배들은 회사에서 주는 퇴직금 외에도 ‘부서 위로금’을 챙기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1997년 IMF(국제통화기금) 사태가 터지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임금이 깎이는 상황에서 신입직원 선발도 뜸해졌다. 이 때문에 신입이 줄면서 기금적립은 줄어드는데, 퇴직하는 선배들의 위로금은 그대로 지출됐다. 선배들은 “내가 그동안 낸 게 얼만데”라며 당당하게 위로금을 요구했고, 후배들은 신입이 없는 상황에서 이대로 가다간 기금이 소진된다며 반기를 들었다. 몇 차례 논쟁 끝에 ‘적립 중단’으로 종결됐다. 당시 얼마 남지 않은 돈은 구성원끼리 배분했다. 결과적으로 퇴직한 선배는 약정된 위로금을 받아갔지만 남은 후배는 위로금은커녕, 기여분마저 손해를 보는 상황이 빚어졌다. 일련의 과정을 수지타산으로 계산해보면 기금관리에 실패해 파산한 셈이다. 우리나라 연금관리 현황과 비교해보면 유사한 점이 많다. 인구는 줄고 기금은 고갈되고 있는 상황이 비슷하다. 기금적립에 대한 장기 대책 없이 현재 세대가 연금해택을 볼 경우, 미래 세대는 기여만 하고 혜택을 포기해야하는 상황이 불보듯 뻔하다.


우리나라 국민연금은 개혁없이 이대로 가다간 머지않아 고갈되고 파산할 수 밖에 없다. 그 피해는 미래 세대가 고스란히 안아야 한다. 이 때문에 연금개혁이 하루라도 빨리 이뤄져야 한다는 전문가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연금개혁은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니다. 인구가 급격하게 감소하는 선진국을 중심으로 연금개혁 해법도 차이가 난다. 우리보다 훨씬 심각한 사회적 갈등을 빚었지만 최근 연금개혁에 성공한 프랑스 사례를 눈여겨봐야 할 시점이다.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지난 3월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연금 수령 연령을 2년 늦추는 연금개혁을 관철시켰다. 국민 70%가 반대하는 상황에서 연금 수령 연령을 62세에서 64세로 늦췄다. 당시 연금개혁에 대한 의회 논의가 지지부진하자, 의회 동의 없이 정부가 단독 입법을 할 수 있는 헌법 제49조 3항을 발동해 법을 통과 시키는 추진력을 보였다. 그는 2017년 집권 이후 노동시장 유연성을 제고하는 노동개혁과 공무원 감축 등 공공개혁, 올해는 연금개혁까지 대중의 인기가 없는 개혁만 골라서 추진했다. 자신의 지지율을 미래를 위한 개혁과 연계시키지 않았다. 마크롱은 지지율을 잃었지만 ‘유럽의 환자’란 조롱까지 듣던 프랑스 경제는 침체 일로인 다른 유럽 국가와 달리 부활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자신의 지지율보다 미래에 대한 합리적 선택에 방점을 둔 지도자의 결단이라는 지적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2021년 12월 관훈클럽 초청 대선 주자 토론회에서 ‘연금 공약이 아직 없는데 개혁을 약속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어느 정당이든 연금 개혁을 선거 공약으로 들고 나오면 무조건 지게 돼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공약으로 구체적으로 내놓지 못했다고 솔직하게 인정하면서 “결국엔 더 내고 덜 받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또 그는 후보시절 “제가 대통령이 되면 과거 정부들과 달리 연금개혁에 대한 초당적 합의가 도출될 수 있도록 행정부가 과학적 근거와 국민 의견조사, 선택 방안의 제시 등을 철저히 준비하고 적극 나서겠다”고 약속했다. 그의 약속에 따라 국민들은 연금개혁에 대한 높은 기대감을 보여왔다. 취임 1년 6개월 만에 최근 첫 밑그림이 나왔다. 정부는 지난달 27일 ‘제5차 국민연금 종합운영계획안’을 발표했다. 윤 대통령의 연금개혁에 대한 철학과 추진의지가 담겼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기대보다 실망이 많았다. 공적연금강화국민행동은 ‘맹탕 연금개혁안’이라고 비판했다. 소득대체율과 보험료율 등 핵심적인 숫자는 없고, ‘논의가 필요하다’는 말만 반복했다는 게 ‘맹탕’이라는 지적 이유다. 향후 연금개혁에 대한 추진의지도 보이지 않았다. 종합운영계획은 지난달 말 국회에 제출됐다. 전망은 더욱 암울하다. 국회가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연금개혁특별위원회를 열어 결론을 낸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정부와 국회가 총선을 앞두고 표를 의식해 서로에 책임을 떠넘기는 ‘핑퐁 게임’을 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말이 실감난다. 이대로라면 연금개혁은 총선 이후로 넘어가 장기표류할 가능성이 높다. 프랑스의 사례를 보더라도 연금개혁은 지지율에 연연해 하지 않는 국가 지도자의 결단과 추진의지가 가장 중요하다.

김길수 중서부경남본부장 kks66@busan.com


김길수 기자 kks66@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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