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세계가 반한 ‘라이스보이 슬립스’… “부산과 인연 있나 봐요”

이우영 기자 verdad@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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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영화제로 부산 돌아온 주역들
부산국제영화제 등 영화상 30여 개
앤서니 심 감독 용궁사 영화에 반영
최승윤 배우는 부산서 차기작 촬영

영화의전당에서 만난 ‘라이스보이 슬립스’ 안소니 심 감독(오른쪽)과 최승윤 배우(왼쪽). 이재찬 기자 chan@ 영화의전당에서 만난 ‘라이스보이 슬립스’ 안소니 심 감독(오른쪽)과 최승윤 배우(왼쪽). 이재찬 기자 chan@

돌고 돌아 부산에 돌아왔다. 감독과 배우가 부산 관객을 1년여 만에 다시 만났다. 세계적 호평을 받은 영화는 그들을 다시 부산으로 이끌었다.

지난 12일 오후 ‘2023 캐나다 영화제’가 열린 해운대구 우동 영화의전당. 영화 ‘라이스보이 슬립스’ 안소니(앤서니) 심 감독과 ‘소영’을 연기한 최승윤 배우를 6층 시네라운지에서 만났다. 이날 ‘관객과의 대화(GV)’를 앞둔 심 감독은 “이런 일로 부산에 다시 온 게 신기하다”고 했다. 그는 “캐나다 대사관에서 한국과 캐나다 수교 60주년을 기념하는 영화제에 초청했다”며 “캐나다 영화를 더 알리고 싶은 마음에 참석했다”고 밝혔다.

‘라이스보이 슬립스’는 한국계 캐나다인 감독의 반자전적 이야기다. 1990년대에 아들만 데리고 캐나다로 이민을 간 엄마 ‘소영’과 아들 ‘동현’의 힘들면서도 애틋한 시간을 그렸다. 두 사람이 강원도를 찾는 마지막 장면까지 16mm 카메라로 따뜻하게 담아낸 작품이다.

영화 ‘라이스보이 슬립스’ 스틸 컷. 판씨네마㈜ 제공 영화 ‘라이스보이 슬립스’ 스틸 컷. 판씨네마㈜ 제공

■ 더욱 특별해진 부산

영화는 꿈같은 여정을 선사했다. 지난해 10월 부산국제영화제(BIFF)에서 캐나다 밖 관객에게 처음 공개된 후 전 세계에서 초청 세례가 이어졌다. 국내외 영화제 등에서 어느덧 30개 넘는 상을 받았다. 최 배우도 모로코 마라케시영화제 여우주연상 등을 석권했다. 감사한 마음을 밝힌 그는 “내년 1월 노르웨이 트롬쇠영화제까지 참석할 예정”이라고 했다.

심 감독은 “너무 감사하고 운이 좋았다”며 “첫 영화가 잘 안돼서 많이 노력하고 열심히 했다”고 소회를 밝혔다. 그는 “상을 받은 것보다 영화를 또 만들 기회가 생긴 게 더 감사하다”며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더 성숙하고 좋은 작품을 즐겁게 만들고 싶은 욕심이 있다”고 했다.

영화 ‘라이스보이 슬립스’에서 ‘소영’ 역을 맡은 최승윤 배우. 이재찬 기자 chan@ 영화 ‘라이스보이 슬립스’에서 ‘소영’ 역을 맡은 최승윤 배우. 이재찬 기자 chan@

다시 돌아온 부산은 두 사람에게 특별한 도시다. 최 배우는 첫 한국 장편 영화를 부산에서 촬영하고 있다. 2019년에는 공동 연출한 다큐멘터리 ‘아이 바이 유 바이 에브리바디’가 BIFF에 초청된 적도 있다. 안무가이기도 한 그가 영화와 무용을 주제로 만든 작품이다. 그는 “부산에선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학생 졸업 작품을 찍고 있다”며 “주변에서 중요한 일이 많이 일어나는 부산과 잘 맞는 것 같다고 말한다”며 웃었다.

캐나다에 살던 심 감독은 어린 시절 이모가 살던 부산을 찾아 BIFF에 참석하는 꿈을 키웠다. 그는 “동네 해수욕장 같던 광안리에서 뛰어다니며 물놀이한 추억도 있다”고 했다. 부산의 잔상은 이번 영화에도 반영됐다. 심 감독은 “주인공 ‘소영’이 아기였을 때 ‘어느 절 앞’에 버려졌다는 내레이션으로 영화가 시작한다”며 “용궁사를 떠올리며 ‘부산 절 앞’이라 시나리오를 썼다가 나중에 수정한 부분”이라 설명했다.

영화 ‘라이스보이 슬립스’ 스틸 컷. 판씨네마㈜ 제공 영화 ‘라이스보이 슬립스’ 스틸 컷. 판씨네마㈜ 제공

강인한 여성 이민자

그렇게 탄생한 ‘소영’이란 캐릭터는 영화에서 쉽게 주눅들지 않는다. 고아원을 전전하다 도시에서 만난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아이와 함께 캐나다로 향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영어가 어눌해도 부당한 일에는 즉각 항의한다. 심 감독은 “성격을 설정해서 시나리오를 쓰진 않았다”며 “의지할 사람 없이 문제를 해결하며 살아왔고, 훌쩍 캐나다로 떠날 수 있는 ‘소영’에게 자연스러운 모습이라 생각했다”고 밝혔다.

최 배우도 “대본을 보면 가끔 이해가 안 되는 대사가 있는데 ‘소영’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며 “초반에 짧게 압축된 그의 인생에서 많은 게 납득됐고, 나도 이렇게 말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영화는 이민자들이 연대하는 모습도 자연스레 풀어낸다. 백인 남성이 대부분이던 공장이 10년 후 이민자 여성이 가득한 곳으로 그려진다. 그들은 고민을 나누거나 함께 기뻐한다. 최 배우는 “홀로 고군분투하던 ‘소영’이 사람들과 함께 고민을 해결하려 한다”며 “삶의 환경이 변화한 걸 간결하게 잘 보여줘서 좋아하는 장면”이라 했다.

영화 ‘라이스보이 슬립스’를 연출한 안소니 심 감독. 이재찬 기자 chan@ 영화 ‘라이스보이 슬립스’를 연출한 안소니 심 감독. 이재찬 기자 chan@

음식은 중요한 매개체이자 그들의 정체성도 드러낸다. 영화에서 이민자들은 공장 탁자에서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눈다. 심 감독은 “캐나다 요양원에서 일했던 동생 경험을 반영했다”며 “동생이 이민자들과 싸온 음식을 나눠 먹으며 서로를 더 잘 이해하게 됐다고 말해줬다”고 했다.

집에서 ‘소영’은 익숙한 한식을 주로 먹는다. 아들 ‘동현’에게 ‘데이비드’라는 이름을 지어줘도, 김치를 담그고 집밥을 바꾸지 않는다. 심 감독은 “밖에서 적응을 잘해도 집에서는 한국 사람으로 사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며 “캐나다에서 살아온 내게도 한식은 물처럼 느껴지는 당연한 음식”이라 했다. 최 배우는 “취향이나 옷 입는 건 달라질 수 있어도 사람 입맛은 가장 바꾸기 힘든 것 같다”며 “인물의 근본적인 모습과 자아를 입맛으로 나타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영화 ‘라이스보이 슬립스’ 스틸 컷. 판씨네마㈜ 제공 영화 ‘라이스보이 슬립스’ 스틸 컷. 판씨네마㈜ 제공

마음이 열리는 강원도

영화에서 몸이 아픈 ‘소영’은 ‘동현’과 강원도를 찾게 된다. 그때 갑자기 화면이 좌우로 넓어진다. 평화로운 시골 풍경이 나타나고, ‘소영’이 ‘동현’에게 작은아버지와 조부모를 소개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심 감독은 “밴쿠버에 다양한 장소가 있어도 하루하루 살기 바빠 아름다운 걸 못 느꼈다는 이민자가 많았다”며 “한국에 돌아가면 먹고사는 걸 떠나 더 열린 마음을 가질 수 있단 걸 화면으로 표현하고 싶었다”고 했다. 최 배우는 “캐나다에서는 ‘클로즈업’ 되거나 상반신만 나오는 장면이 많다”며 “한국에선 넓은 풍경 속에 인간은 작게 담아 숨쉴 공간이 있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강원도에서 ‘동현’은 죽은 아버지 유품인 군복을 입는다. 삼촌을 따라가 노란 머리카락을 밀어버린다. 목욕탕에서 때를 벗기고, 푸른 렌즈도 잃어버린다. 그렇게 ‘동현’은 아버지와 가족을 느끼고, 자신의 뿌리에 가까워지게 된다. 큰소리가 오가던 ‘소영’과 ‘동현’의 사이도 애틋해진다.

심 감독은 “청소년이 되면 정체성에 혼란이 오는 이민자들이 어렸을 때 모습을 없애려는 경우가 많다”며 “청소년이 된 ‘동현’도 집에서 한식을 잘 먹지 않고, 백인 친구 옷만 입고, 머리를 염색한 채 파란 렌즈를 끼곤 했다”고 설명했다.

영화 ‘라이스보이 슬립스’ 스틸 컷. 판씨네마㈜ 제공 영화 ‘라이스보이 슬립스’ 스틸 컷. 판씨네마㈜ 제공

죽음에 가까워지는 ‘소영’은 아들에게 업혀 남편의 산소로 향한다. 눈물을 흘리며 ‘동현’에게 “집에 가자”라고 말하며 영화는 끝난다. 마지막 대사에 대해 심 감독은 “집이 어디든 상관없다고 생각한다”며 “둘이 함께 있는 곳이 집”이라고 했다. 최 배우는 “그게 어디든 자기가 자신으로 있을 수 있는 곳이 집이라 생각한다”고 밝혔다.

영화는 ‘소영’이 살아남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그래도 희망은 남는다. 심 감독은 “‘소영’이 아프면서 ‘동현’과 관계가 좋아졌고, 중요한 대화를 나누며 가족까지 만났다”며 “차라리 사이가 점점 나빠지고 대화가 없는 상태가 계속되는 게 더 슬플 것 같다”고 했다. 최 배우는 “서로의 소중함을 알게 된 데다 그들 인생에 큰 변화가 찾아왔다”며 “‘동현’이가 달라졌고, 할아버지가 며느리에게 사과를 했고, 할머니가 손주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기에 오히려 희망적인 결말인 것 같다”고 했다.

영화 ‘라이스보이 슬립스’ 포스터. 판씨네마㈜ 제공 영화 ‘라이스보이 슬립스’ 포스터. 판씨네마㈜ 제공

더 나아갈 두 사람

올해 4월 한국에서도 ‘라이스보이 슬립스’ 개봉이 성사됐다. 기대보다 큰 주목을 받은 두 사람에게 차기작은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이에 대해 심 감독은 “친구들과 아무도 모르게 작은 영화를 만들어 세상에 내놓으면 어떨까 생각한 적도 있다”며 “예전과 같은 마음과 과정으로 차기작에 임하려 하는데 다음 영화는 투자 규모도 커질 듯해 부담이 되는 건 사실”이라고 밝혔다.

심 감독은 다음 작품 시나리오를 쓰는 중이다. 사모펀드 운용사인 MBK 김병주 회장이 쓴 자전적 소설 ‘오퍼링스’를 각색하는 영화다. 뉴욕 월가 투자 은행에서 근무하던 한국계 미국인 ‘대준’의 성장기를 그릴 예정이다. 할리우드 제작사 ‘어나니머스콘텐트’와 김지운 감독과 송강호 배우가 세운 ‘앤솔로지스튜디오’가 공동 제작한다.

영화의전당에서 만난 ‘라이스보이 슬립스’ 안소니 심 감독(오른쪽)과 최승윤 배우(왼쪽). 이재찬 기자 chan@ 영화의전당에서 만난 ‘라이스보이 슬립스’ 안소니 심 감독(오른쪽)과 최승윤 배우(왼쪽). 이재찬 기자 chan@

심 감독은 “한국계 미국인이 가진 고민뿐 아니라 한국 정치와 역사를 이해하며 인물이 변화하는 모습 등을 담게 될 것”이라며 “부산에 머무는 동안 시나리오 일부를 쓸 수도 있다”고 밝혔다.

부산에서 영화를 촬영 중인 최 배우는 다른 분야에 대한 도전도 이어갈 예정이다. 무용뿐 아니라 동화책 출판도 준비하고 있다. 그는 “우선 찍고 있는 영화를 잘 마무리하려 한다”며 “아티스트들이 동화책을 만드는 독립 출판사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로 했다”고 귀띔했다. 최 배우는 “권선징악 같은 교훈적인 내용은 아닐 것”이라며 “무용을 하면서 경험하고 체험한 감각들을 아이들에게 전달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우영 기자 verdad@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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