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위트컴 장군의 진정한 승리
“불은 영주동 산비탈 판잣집에서 일어났다. 그 불길이 장장 열네 시간 동안 번지고 번져, 부산 번화가였던 40계단 부근과 동광동, 부산역 등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불가항력의 화재가 아니었다. 당시 경찰국장이었던 김 모가 산비탈의 판잣집을 소탕할 좋은 기회랍시고 소방관들로 하여금 진화 작업을 중단하게 했고, 그사이에 분 바람을 타고 진화가 불가능한 대화재로 커져 버린 것이다. 폐허가 된 부산은 좀처럼 재건되지 않았다.” 윤정규 소설가 ‘불타는 화염’.
1953년 11월, 도시가 온통 불바다로 변하면서 29명이 죽고, 6000여 세대 3만 명이 집을 잃었다. 가난한 나라는 추위와 배고픔에 떠는 제 국민을 품을 여력조차 없었다. 유엔군 군수사령관으로서 부산에 부임했던 리차드 위트컴 장군은 상부의 승인 없이 미군 군수품 창고를 열어 천막과 입을 것, 먹을 것을 이재민들에게 나눠줬다. 그는 부산 영도구 피란민촌을 둘러보던 중 배가 부른 산모가 보리밭으로 뛰어가 아기를 낳는 장면을 목격하고 조산소를 설치하기도 했다. 70년 전, 헐벗은 한국의 모습이다.
장군은 미국 의회 청문회에 불려 갔지만, “전쟁은 총과 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나라 국민을 위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라는 소신을 밝혀 기립박수를 받았다고 한다. 대화재 이듬해에 부산 시민들이 공덕비를 세웠지만, 지금은 사진 한 장만 달랑 남아있다. ‘전쟁고아의 아버지’ 위트컴 장군은 유언에 따라 부산 남구 유엔기념공원에 아내와 함께 안장돼 있다. 지난 11일 인근 평화공원에서 그의 조형물 제막식이 열렸다. 지난해 한국 정부가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한 것을 계기로, 시민 1만 8359명이 1만 원씩 성금을 기탁해 3억 원을 모금했다고 한다. 정부나 기업의 지원은 아예 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를 진심으로 기억하고, 그 생각을 실천하겠다는 의지다.
장군의 인류애를 추모하는 그 시간에도 전쟁과 학살은 그치지 않고 있다. 군사 강국 러시아는 혹한기를 앞두고 우크라이나의 민간인을 드론과 미사일, 대포로 공격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알시파 병원에서는 연료 부족으로 인큐베이터 가동이 멈추면서 신생아들이 숨지는 상황마저 빚어지고 있다. ‘시체가 쌓여 묘지처럼 변했다’는 현지의 전언이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그 나라 국민을 위하는 것이 전쟁에서 진정한 승리”라는 메시지가 그들에게는 들리지 않는 걸까. 제2, 제3의 위트컴 장군이 그곳에도 나타날 수 있을까.
이병철 논설위원 peter@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