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로 꽃 피운 궁중채화 “더 널리 알리고 싶어요”
국가무형문화재 궁중채화장 황수로
궁중에서 비단으로 만든 꽃 복원
2013년 무형문화재 인정 이어
올 10월 은관문화훈장 수훈 결실
“궁중채화는 인내 필요한 작업”
“다원 만들어 우리 차 보급 계획”
궁중채화는 궁중에서 비단이나 모시로 제작한 꽃을 말한다. 조선 시대 궁중에서 큰 행사나 잔치가 있을 때 만들어서 사용한 가화(假花)로, 시들지 않음을 통해 왕조의 영원불멸을 염원했다.
국가무형문화재 제124호 궁중채화장 황수로 박사는 최근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지난 10월 27일 서울에서 열린 ‘2023 문화예술발전 유공 시상식’에서 훈장을 수훈한 황 박사를 경남 양산시 매곡동 한국궁중꽃박물관에서 만났다. 한국궁중꽃박물관은 조선왕조 궁중채화를 감상하고 체험할 수 있는 궁중 꽃 전문 박물관이다.
황 박사는 외할아버지의 잠화 이야기부터 꺼냈다. “외할아버지가 고종 때 궁내부 주사로 봉직했어요. 행사가 있으면 머리에 장식용 비단 꽃인 잠화를 꽂으셨죠. 천이나 밀랍으로 만든 궁중채화는 보관이 어려워 유물로 남겨진 것이 없었어요. 그래서 내가 복원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죠.”
황 박사는 태창기업 창업자인 황래성 회장의 딸이다. 1935년에 태어난 그는 경남여고를 졸업한 뒤 이화여대 수학과에 진학했다. “아버지가 서울역 뒤 만리동에 오래된 한옥을 하나 구해주셨어요. 집문서를 던져주며 이걸로 4년간 학비는 다 줬다고 하셨죠.” 황 박사는 대학 친구 7명을 하숙생으로 받아 학비·생활비를 해결했다. 그는 그렇게 경영에 눈을 떴다며 웃었다.
황 박사는 졸업 후 도쿄대 교수가 된 남편을 따라 일본에 갔다. “꽃꽂이와 다도 공부를 시작했는데, 일본인들이 한국에는 차나 꽃 문화가 없다고 하는 거예요.”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명주를 짜고 꽃을 만들던 것을 봤던 황 박사는 ‘아니다’라고 주장했지만 직접 증명할 방법이 없어 애를 태웠다고 했다.
한국에 돌아온 황 박사는 1965년 (사)수로회를 설립하고 꽃꽂이를 가르쳤다. 경남 사천 다솔사 효당(최범술) 스님 등을 찾아 다니며 꽃과 다도를 탐구했다. 동해안별신굿 지화장에게서 종이꽃을, 대인사 이도주 스님에게서 사찰의 가화를 배웠다. 전통 재현에 있어서는 역사적 고증이 중요했다. 황 박사는 동아대 사학과 대학원에 진학해 궁중채화를 본격적으로 연구했다.
“1997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사업을 물려 받으니 천지가 아득했어요. 회원권을 팔아 골프장(동부산컨트리클럽)을 건설해야 하는데 IMF 사태까지 겹쳐 힘든 시기도 보냈죠.” 사업이 본궤도에 올랐을 때 그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아버지는 일맥문화재단을 설립해 21년간 약 1만 명에게 장학금을 줬는데, 나는 박물관을 만들어 사회에 기여하고 싶다고 했죠. 회사 창고에서 외할아버지의 꽃을 만들며 재현한 궁중채화의 관리와 보존을 위해서는 박물관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됐거든요.”
2005년 APEC 정상회의 특별전 ‘조선 왕조 궁중채화전’(부산박물관), 2006년 한국궁중채화연구원 설립, 2007년 UN 한국 전통 공예전(뉴욕 UN본부), 2009년 국립중앙박물관 개관 100주년 기념 ‘조선시대 향연과 의례 초대전’ 등 궁중채화를 알리기 위한 황 박사의 노력은 2013년 결실을 맺었다. 그해 1월 14일 황 박사는 ‘중요무형문화재 제124호 궁중채화 보유자’로 인정받았다.
2019년 황 박사는 한국궁중꽃박물관을 개관했다. 전통 궁궐 건축 양식의 수로재와 비해당에서는 순조와 고종 때의 진찬의궤(왕·왕비·왕대비의 기념일에 음식을 올린 의식을 기록한 의궤)를 근거로 재현한 궁중채화, 밀랍으로 만든 윤회매 등을 관람할 수 있다.
황 박사는 “궁중채화는 은은한 색감을 얻기 위해 천연염색을 하는데 그게 가장 어렵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염색한 비단을 많이 사용하지만 계절이나 꽃에 따라 모시·모직물도 사용한다. 송홧가루에 꿀을 섞어 화분을 표현하고 밀랍으로 꽃잎을 코팅하기도 해서 궁중채화에 실제로 벌이 날아들기도 한다. 황 박사는 화준(화병) 안에 모인 꽃과 새, 나비는 ‘왕, 신하, 백성은 모두 하나’라는 의미도 함께 전한다고 설명했다.
지난 4월 한국궁중꽃박물관에서 ‘제1회 아름다운 찻자리 대회’가 열렸다. 황 박사는 “선비차, 규방차, 의식차 등 종류에 따라 우리 차 문화가 정확하게 발전해 나갈 수 있게 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골프장 유휴부지에 대형 다원을 만들고 있어요. 현재 1만 9140㎡(5800평)에 차나무를 키우고 있고, 앞으로 규모를 더 키워서 누구나 우리 차를 쉽게 마실 수 있도록 전문 다원을 만들고 싶어요.”
현재 문화재청에 등록된 궁중채화 이수자는 총 5명. 여기에는 황 박사의 아들 최성우 일맥문화재단 이사장도 포함되어 있다. 최 이사장은 서울에서 복합문화공간 통의동보안여관을 운영하고 있는데, 여기서 궁중채화의 현대적 확장 가능성을 모색하는 궁중채화 서울랩을 진행하고 있다.
황 박사는 수천 송이의 꽃을 만드는 궁중채화 작업에는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다다고 했다. 인터뷰 말미 그는 작업실에서 만든 무궁화 코사지를 보여줬다. “더 많은 사람들이 국화인 무궁화를 달고 다니면 좋겠다는 생각에 자주 선물해요. 해외 박물관에 가면 한국관 전시 코너가 빈약하다는 생각을 해요. 우리 문화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서 작품 기증이나 전시 등 해외 활동을 더 적극적으로 하고 싶어요.” 기록으로만 남았던 궁중채화를 현실로 꽃 피워낸 궁중채화장 황수로 박사의 이야기다.
오금아 기자 chris@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