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죽방렴에 멸치 대신 정어리만… 위기 맞은 550년 어업유산

김현우 기자 khw82@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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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권 44곳 어획량 90% 급감
6월 이후 사실상 ‘실종’ 어민 한숨
생활고에 어업 지속 여부 불투명
세계중요농업유산 등재 악영향

경남 남해군 지족해협의 한 죽방렴 내부 모습. 멸치는 온데 간데 없고 쓰레기만 가득하다. 김현우 기자 경남 남해군 지족해협의 한 죽방렴 내부 모습. 멸치는 온데 간데 없고 쓰레기만 가득하다. 김현우 기자

“멸치가 아예 씨가 말랐습니다. 죽방렴이 만들어진 이후 처음인 것 같습니다”

전국에서도 가장 물살이 빠른 곳 가운데 하나인 경남 남해군 지족해협. 이곳은 풍족한 어족 자원 만큼이나 특색 있는 어업방식으로 유명하다. 남해 앞바다에서만 볼 수 있는 원시어업, 죽방렴 어업이 아직도 성행하고 있다.

죽방렴은 바다 한복판에 참나무 기둥을 세운 뒤 대나무를 엮어 만든 V자형 구조물이다. 물살과 물때를 이용해 고기가 안으로 들어오면 가뒀다가 필요한 만큼 건지는 재래식 어항으로, 특히 이곳에서 생산되는 ‘죽방렴 멸치’는 최상급 멸치로 인정 받는다.

보통 11월은 질 좋은 멸치가 많이 잡혀 어민들의 기대감이 큰 시기지만, 어찌된 일인지 죽방렴으로 향하는 어민 박대규 씨(죽방렴자율관리공동체위원장)의 표정은 어둡기만 하다. 지난 6월 이후 멸치 어획량이 사실상 전무하기 때문이다.

박대규 씨는 “최근 몇 년 동안 멸치 어획량이 조금씩 줄고 있지만 그래도 매달 꾸준히 나오는 편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다르다. 6월부터 아예 멸치 씨가 말랐다. 30년 가까이 죽방렴 어업을 하고 있지만 이런 적은 처음이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죽방렴 안을 유영하고 있는 정어리 떼 모습. 김현우 기자 죽방렴 안을 유영하고 있는 정어리 떼 모습. 김현우 기자

통상적으로 죽방렴 어업은 4월 초부터 11월 말까지 이어진다. 이곳 해협의 멸치가 11월 말 절기 ‘소설’을 전후해 먼 바다로 나갔다가 날씨가 풀리면 다시 돌아오기 때문인데 해당 기간 죽방렴 1곳 당 어획 되는 멸치 양은 한 해 2~3t 정도다. kg당 3만 원 씩 팔면 6000만~7000만 원의 수익을 올리는 구조다.

하지만 올해는 사정이 다르다. 박 씨가 운영하는 죽방렴의 경우 3~5월까지 300kg이 잡혔을 뿐, 6월부터는 아예 멸치 자체를 보지 못했다. 실제 11월 14일 찾은 박 씨의 죽방렴에는 멸치가 단 한 마리도 없었다.

박 씨의 죽방렴 뿐만이 아니다. 남해 앞바다에는 지족해협에 23개, 인근 삼천포해협에 21개 등 총 44개의 죽방렴이 있는데 모두 비슷한 상황이다.

멸치 대신 어항을 가득 채운 건 정어리 떼와 쓰레기다. 잡아도 잡아도 끊임 없이 정어리 떼가 들어서고 있는데 그나마 조금씩 들어오는 멸치까지 잡아먹고 있다.

그물을 치고 뜰채로 고기를 떠보지만 잡히는 건 정어리 뿐이다. 김현우 기자 그물을 치고 뜰채로 고기를 떠보지만 잡히는 건 정어리 뿐이다. 김현우 기자
멸치 대신 정어리라도 잡아 분류해 보지만 어민들로선 답답함이 클 수밖에 없다. 김현우 기자 멸치 대신 정어리라도 잡아 분류해 보지만 어민들로선 답답함이 클 수밖에 없다. 김현우 기자

죽방렴에 들어서는 박 씨는 한숨부터 내쉰다. 예전 같으면 죽방렴에 들어가서 뜰채로 기분 좋게 멸치를 퍼올려야 하지만 지금은 먼저 쓰레기를 치운 뒤, 어디에 써야 할 지도 모를 정어리를 퍼올려야 한다. 넘쳐 나는 정어리로 일단 액젓을 담긴 했지만 어떤 맛을 낼지, 소비자들이 얼마나 구입할지 알 수 없는 상황. 간간이 잡히는 새우와 다른 어종 물고기가 아니면 끼니조차 해결하기 힘들 정도다.

일각에선 바다 환경이 변해 앞으로 이 같은 상황이 계속 이어질 경우 죽방렴 어민들 가운데 상당수가 생활고 탓에 이탈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박 씨는 “일단 올해 시범적으로 정어리로 액젓을 담갔는데, 숙성되는데 2년 정도 걸린다. 데이터가 없으니 성공 여부도 모르겠다. 올 한해는 겨우 넘어갔는데 내년, 내후년에도 이런 상황이라면 어민 대다수가 죽방렴을 유지할 지 심각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한 수산업체 창고 모습. 예년 같으면 멸치로 가득 차 있어야 하지만 올해는 텅텅 비어 있다. 김현우 기자 한 수산업체 창고 모습. 예년 같으면 멸치로 가득 차 있어야 하지만 올해는 텅텅 비어 있다. 김현우 기자
6월 이후 멸치 어획량이 사라지면서 죽방렴 멸치 건조장도 개점 휴업상태다. 김현우 기자 6월 이후 멸치 어획량이 사라지면서 죽방렴 멸치 건조장도 개점 휴업상태다. 김현우 기자

더 큰 문제는 550년 넘게 이어진 문화유산 ‘죽방렴’의 지속가능성이 흔들린다는 점이다. 죽방렴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어업유산으로, ‘남해군을 상징하는 전통어업경관’이자 ‘바다를 지키는 자연친화 적정어업’, ‘남해군 지역경제 활성화의 밑거름’이라는 현대적 가치까지 보유하고 있다.

이에 지난 2010년 명승 제71호, 2015년 국가중요어업유산 제3호, 2019년 국가무형문화재 138-1호로 지정됐으며, 올해 초에는 세계중요농업유산 등재 신청을 마쳤다.

멸치가 잡히지 않는다고 해서 전통어업방식과 경관적 가치가 줄어들진 않겠지만 가장 중요한 어민이 사라진다면 등재에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한 어민은 “아무리 희귀성과 역사성이 중요해도 결국 죽방렴을 관리·보존하는 건 어민이다. 현재 죽방렴 어민 대부분이 부업 없이 죽방렴에만 집중하고 있는데, 수익이 사라진다면 결국 죽방렴 관리가 안 될 것이고, 이는 결국 세계중요농업유산 등재에도 악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남해군 지족해협에 있는 죽방렴 모습. 바다 환경이 급격히 변하면서 지속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김현우 기자 남해군 지족해협에 있는 죽방렴 모습. 바다 환경이 급격히 변하면서 지속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김현우 기자


김현우 기자 khw82@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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