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여는 시] 닻 / 함민복(196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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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없는 날

배는 닻의 존재를 잊기도 하지만

배가 흔들릴수록 깊이 박히는 닻

배가 흔들릴수록 꽉 잡아주는 닻밥

상처의 힘

상처의 사랑

물 위에서 사는

뱃사람의 닻

저 작은 마을

저 작은 집

- 시집 〈말랑말랑한 힘〉(2005) 중에서

‘상처’가 ‘힘’일 수 있고 ‘사랑’일 수 있다는 생각은 어디에서 오게 될까? 그것은 생의 흔들림, 생의 신산(辛酸)을 겪은 체험에서 올 것이다. 한(恨)이 더없이 깊어지면 그 한은 오히려 삶의 버팀목이 되어 힘든 순간들을 견디게 할 힘을 준다. 양(陽)이 지극하면 음(陰)이 되고, 음이 지극하면 다시 양이 된다. 세상은 면을 넘어 입체로 구성되어 있고 우주는 소세계로 중첩되어 있어 하나의 관점으로 말할 수는 없다.

함민복 시인이 말하고 있는 ‘닻’과 ‘닻밥’이 그런 인식을 보여주는 사물이 아닐까? 그것들은 ‘배가 흔들릴수록’ ‘깊이 박히고’ ‘꽉 붙잡아 주는’ 힘을 지님으로 인해, 음이 양이 되는 역설적 현상을 구체화한다. 이 점은 뱃사람에게 닻과 같은 구실을 하는 ‘저 작은 집’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뱃사람의 흔들림을 붙잡아 주는 ‘작은 집’의 이미지는 여림과 단단함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시 형태에서도 ‘작은 집’은 닻처럼 달려 독자의 흔들리는 감정을 붙잡아 준다. 김경복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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