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 박서보의 마지막 말 “구상 떠올랐다. 캔버스 준비해라”

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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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보 화백 별세 후 재단 첫 인터뷰
삶 마지막까지 작업 고민한 모습 전해
생전 마지막 전시 된 조현화랑 개인전
별세 후 전시 보러 전국서 팬 몰려
박서보 미술관·서울 기념관 계획

강강훈 ‘모던보이-박서보’ 조현화랑 제공 강강훈 ‘모던보이-박서보’ 조현화랑 제공

명실공히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세계가 반한 단색화의 거장 박서보 화백이 지난달 14일 세상과 이별했다. 거장이 떠난 지 한 달이 지났지만, 그를 향한 그리움의 깊이는 더해간다.

지난 8월 31일 부산 조현화랑에서 시작한 그의 신작전은 의도치 않게 마지막 개인전으로 진행되고 있다. 전시는 원래 11월 중순 끝나기로 했지만, 마지막 전시를 보고 싶다는 요청이 전국에서 쏟아져 12월 3일까지 연장됐다. 요즘 조현화랑에는 세상을 떠난 거장에 대한 추모의 의미로 검은색 옷을 입은 관객이 유난히 많고 거장의 초상화 아래엔 누군가 두고 간 국화꽃을 자주 볼 수 있다.

고인은 지난 2019년 기지 재단을 직접 만들어 작품 관리와 아카이브 구축, 영상과 출판 콘텐츠 제작, 젊은 창작자 지원을 하기도 했다. 화백의 죽음이 알려진 이후 이 재단은 더 바빠졌다. 전 세계에서 박 화백 작품 관련 협업과 전시 업무, 기념 사업 등을 문의하기 위해 재단을 찾고 있다.

재단은 최근 박서보 재단(구 기지 재단)으로 이름을 변경한 후 전국 언론 중 처음으로 <부산일보>와 공식 인터뷰를 진행했다. 재단 관계자는 투병 중에도 치열하게 작업을 이어가던 거장의 마지막 모습을 비롯해 제주 박서보 미술관의 건립 상황, 앞으로 펼칠 기념 사업 등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던 귀한 이야기를 <부산일보>에 전해 주었다.


“변하지 않으면 추락한다. 그러나 변해도 또한 추락한다.”

박 화백은 이 명제을 머리에 담고 이에 따르기 위해 평생을 작품에 몰입했다고 한다. 이 명제를 다시 강조한 이유는 그의 마지막 전시와 맥락이 닿아있기 때문이다. 전시에는 대중에게 잘 알려진 연필 묘법이나 한지 묘법이 아니라 새로운 연필 묘법 작품들이 대거 등장했다.

초기, 중기, 후기로 구분되는 기존 묘법 시리즈는 ‘도를 닦는다’ ‘수행하는 심정’이라고 표현될 만큼 엄청나게 고단한 작업이다. 그의 작업 과정을 본 이들은 “어떻게 사람이 저럴 수가 있나”라고 말했다고 한. 박 화백은 “집중을 통해 나를 버리고 나를 비워내는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박서보의 연필 묘법 신작 'Ecriture No.200420’ 조현화랑 제공 박서보의 연필 묘법 신작 'Ecriture No.200420’ 조현화랑 제공

박서보의 연필 묘법 신작 'Ecriture No.200128’ 조현화랑 제공 박서보의 연필 묘법 신작 'Ecriture No.200128’ 조현화랑 제공

그러나 그의 마지막 전시에선 기존 묘법과 다른 선을 만날 수 있다. 나이가 들며 힘이 떨어진 화백은 기존 묘법의 방식을 감당할 수 없었고 떨리는 손이 만들어 낸 선의 변화를 받아들였다.

재단 관계자는 “화백님은 손이 떨리면 떨리는 대로 또 다른 맛을 줄 수 있고 현재 나의 신체성에 맞는 작품의 밀도가 보는 사람들을 편안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달라진 묘법을 통해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작업에 몰두했던 작가의 열정이 고스란히 작품에 담겼다”고 설명했다. 관계자는 “관객들이 작품 앞에서만이라도 모든 것을 잊고 치유받기를 원하셨다”는 말도 덧붙였다. 실제로 조현 화랑에 걸린 작품들은 강렬했던 기존 작품과 다르지만, 오히려 잔잔한 울림이 주는 감동이 크다.


박서보 화백의 손자인 박지환 작가의 디지털영상 작품. 조현화랑 제공 박서보 화백의 손자인 박지환 작가의 디지털영상 작품. 조현화랑 제공


박서보 화백의 손자인 박지환 작가의 디지털영상 작품. 조현화랑 제공 박서보 화백의 손자인 박지환 작가의 디지털영상 작품. 조현화랑 제공

박서보 화백의 손자인 박지환 작가의 디지털영상 작품. 조현화랑 제공 박서보 화백의 손자인 박지환 작가의 디지털영상 작품. 조현화랑 제공

한국을 비롯해 전 세계 미술 애호가들을 사로잡은 박서보 특유의 강렬한 묘법은 이번 전시에선 디지털영상 작품으로 구현됐다. 화백의 손자인 박지환 작가는 박서보 묘법 한지 작품을 확대해 눈으로 볼 수 없었던 그림의 미세한 결을 다 보여준 후 다시 거리를 넓혀 나가는 영상을 제작했다. 화랑 1층 중간에 설치된 이 작품은 보는 순간 바로 압도되는 것 같다. 박 화백은 부산 조현화랑을 들러 이 작품을 보았고 “멋있다”라고 외칠 만큼 마음에 들어 했다고 한다.





박서보 화백의 세라믹 작품들. 조현화랑 제공 박서보 화백의 세라믹 작품들. 조현화랑 제공

박서보 화백의 세라믹 작품들. 조현화랑 제공 박서보 화백의 세라믹 작품들. 조현화랑 제공

2021년 베니스 비엔날레를 통해 처음 소개된 세라믹 작품은 이번 전시에서 좀 더 매력적으로 변신했다. 박 화백이 자연으로 온 색이라고 소개했던 단풍색, 공기색, 올리브색 등이 흙과 만나 더 강해졌다. 흙을 하나하나 덧붙여 만들어진 날은 입체감이 살아있다. 그 앞에 선 관객은 한참을 작품에 빠져든다.

박 화백은 죽기 직전까지 다음 작업에 대해 준비했다고 한다. 작고하기 이틀 전인 10월 12일 아내와 며느리가 박 화백이 입원했던 병원을 방문하니, 그렇게 힘든 순간에도 며느리에게 “어떤 식으로 작업할지 새로운 구상이 떠올라 그것들과 씨름하느라 밤새 잠을 못 잤다. 집에 돌아가면 할 일이 많으니 작업을 바로 시작할 수 있도록 캔버스 배접을 서둘러라”며 준비를 부탁할 정도였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거장은 온통 작품 생각뿐이다는 걸 알 수 있다.

박서보 재단은 올 3월 착공식을 가진 제주도 박서보 미술관의 건립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현재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박서보의 예술을 응축한 미술관을 고민하고 있다. 제주와 비슷한 환경을 가진 스페인의 화산섬 카나리아 제도 출신 건축가 페르난도 메니스가 박서보 미술관의 건축을 맡아 제주의 자연을 살린 미술관을 기대하고 있다. 제주 박서보 미술관은 제주 메리어트 호텔이 주도해서 준비, 기획, 건립 중이며 박서보 재단은 콘텐츠 관련 지원만 하게 된다.

재단은 서울 서대문구 자택 근처에 박서보 기념관도 준비를 시작했다. 이 곳은 박서보의 유산을 이어 나가기 위한 활동 기반이 될 예정이다. 재단은 이외에도 대규모로 아카이브를 구축 중이며 박 화백이 남긴 작품과 기록들을 많은 이들이 향유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도 찾고 있다.

재단 관계자는 마지막으로 “박서보 화백의 바람이었던 자연이 어우러진 곳에 박서보 미술관을 짓는 것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겠다. 박 화백이 마지막 바람이라고 말할 정도로 박서보 미술관에 대한 의지가 강했다. 많은 관심 부탁한다”고 전했다.


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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