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분초사회'

강윤경 논설위원 kyk9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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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한 잔에 4분, 버스 요금은 2시간, 스포츠카 1대는 59년.’ 영화 ‘인 타임’은 모든 비용 지불이 시간으로 대체된 세계, 시간이 곧 돈인 미래의 이야기다. 인간은 25세가 되면 노화가 멈추고 팔뚝에 새겨진 카운트 바디 시계에 1년의 유예 시간을 제공받는다. 이 시간으로 삶에 필요한 것들을 구매해 생활하는데, 시계 숫자가 0이 되는 순간 심장마비로 죽는다. 시간을 많이 가질수록 영생을 누리고 시간이 없으면 노동으로 사거나, 누군가에게 빌리거나, 훔치는 수밖에 없다. 영화는 시간에 따라 빈부가 극명하게 갈리는 세계를 보여 주며 시간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2011년 개봉한 이 영화는 2069년의 미래를 상정해 영화적 상상력을 펼치는데 ‘인 타임’ 속 세계는 이미 우리 앞에 와 있는 미래다. 지금 우리는 시간이 돈보다 중요해진 시대에 ‘분초(分秒)’를 다투며 살고 있다. 넷플릭스나 유튜브 영상을 배속으로 감상하고 모바일 앱 여러 개를 동시에 켜 놓고 여러 일을 한꺼번에 처리하는 멀티태스킹을 한다. 책 한 권을 정독하기보다 요약본을 찾고 숏폼 콘텐츠가 대세를 이루는 것도 같은 현상이다. 영화 ‘밀수’처럼 한글 자막이 나오는 한국 영화가 등장하는 것도 이런 시대적 배경 때문이다.

소유 경제에서는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해 돈이 중요했지만, 볼 것, 할 것, 즐길 것이 넘쳐나는 경험 경제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시간이 더 중요한 자원이 됐다. 돈은 대출이라도 받을 수 있지만 시간은 대출받을 수도 없다. ‘가성비’가 아니라 시간 대비 가치를 따지는 ‘시성비’의 시대가 된 것이다. 인공지능(AI) 기반의 기술혁명은 이를 가속한다. 자율 주행은 운전 중 ‘딴짓’을 가능하게 하고 챗GPT는 많은 부분 인간의 정신적 노동을 대체한다.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는 최근 발간한 ‘트렌드 코리아 2024’의 핵심 키워드로 ‘분초사회’를 제시했다. 사용 시간의 밀도를 높이기 위해 노력하는 요즘 사람들의 경향성을 반영한 키워드다. 새로운 정보와 기술이 빠르게 등장하고 기존 가치와 질서도 급변해 불확실성이 커지는 시대에는 변화에 대한 적응력과 끊임없는 학습이 요구된다고 덧붙인다. 그러나 그게 다는 아닐 것이다. 때론 가속도와 강한 자극에서 벗어나 인간적 사유의 힘을 키우는 배회하는 시간이 더 필요한 게 아닐까. 시간에 쫓기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지배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강윤경 논설위원 kyk93@


강윤경 논설위원 kyk9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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