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칼럼] 요즘 이혼이 잦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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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희 공모 칼럼니스트
갈등 없는 관계 건강하다 단정 못해
누군가 마냥 희생하고 있을 수 있어

과거 많은 경우에 순응했던 여성도
이젠 자기 목소리 찾는 시대로 변화

치열하고 솔직한 대화 지속 위해선
성실하게 잘 싸우는 기술도 찾아야

누군가와 교제를 하고 나면 그를 만나기 전의 나와 그와 헤어질 때의 나는 어딘가 다른 사람이 되어 있곤 한다. 그것은 아마도 이 때문일 것이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언제 읽어도 감탄하며 끄덕이게 되는 정현종 시인의 작품 ‘방문객’에 실린 시구는 정확하다. 한 사람의 일생을 끌어안는 일은 결코 만만치 않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누군가를 인생의 방문객으로 맞아 내 삶에 들어왔다 나간 모든 경험들은 자신에게 변화의 계기를 제공할 수 있다.

그 변화는 예컨대 가볍게는 커피를 마시지 않던 내가 커피 애호가를 만나 원두 생산지와 로스팅 기법을 따져가며 커피를 마시게 되는 일이거나 마블 시리즈가 제일 재밌는 줄 알던 내가 소위 독립영화와 예술영화들을 매주 감상하는 하드 트레이닝을 받은 끝에 영화에 대해 아는 척할 수 있게 되는 정도다. 파트너의 취향과 취미를 배우며 다름을 통해 자신의 기호를 확장하는 것은 가장 기초적이고도 쉬운 변화다. 그에 반해 가치관이나 신념의 대립, 민감한 사안들에 대한 갈등은 서로의 차이를 수용하는 난이도가 올라간다.

“너는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과거를 함께하지 못했고 미래 역시 맹세하지 않았으며 찰나의 현재에 연인으로 함께 서 있을 뿐인 둘은 서로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화가 필요하고 대화를 통해서 내가 모르는 그를 불러내고 알아가야 한다. 이 과정에서 맘이 상하는 다툼이 발생할 수도 있다. 사이가 틀어지고 냉전과 화해를 거듭하다가 끝내 이별하기도 한다. 그러나 갈등은 묻어두기보다 터뜨려야 향후 동일한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분명하다. 돌이켜보면 대립은 치열해도 좋았다. 치열할수록 그리고 솔직할수록 상대가 바라보는 세계를 더욱 구체적으로 그려보며 교감할 수 있었고 대화를 나누기 전과는 아주 달라져 있었다.

나이가 들수록 싸울 에너지도 줄어든다고 하던데 맞는 말 같다. 언제부터인가 누구와 함께하든 잘 부딪히지 않게 되었다. ‘아, 너는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하지만 그것이 상대방에 대한 호기심을 포기한 것이 되고 나면 열정은 더 이상 자라지 않는다. 웃으면서 상처 주지 않으면서 각자의 의견과 주장들, 속사정을 숨김없이 끝까지 쏟아낼 때 상대와 한걸음 가까워진다. 이때 중요한 스킬 중 하나는 마치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처럼 질문과 대답을 끈질기게 주고받는, 잘 싸우는 기술일 것이다. 감정을 다스리는 인내의 기술을 터득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건 갈등을 직면하고 그 순간에 얼굴을 붉히거나 마음에 상처를 남기는 언쟁이 아닌 건강한 대화를 성실히 계속 이어 나갈 수 있는 기술이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원래부터 잘 맞아서 다투지 않고 그냥 잘 지내는 게 가장 좋은 것 아닌지 반문할 수 있다. 혹은 우리는 어려서부터 너무 세뇌를 당해왔는지도 모른다. “친구들과는 싸우지 말고 항상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갈등이 없는 관계는 어딘가 건강해 보이지 않는다. 사소한 갈등마저 전혀 없다면 누군가 희생하고 있는 게 아닐까 의심이 든다. 혈연 간에도 서로의 속마음을 모를 때가 있는데 아무 사이도 아닌 남과 남이 만난 관계에서 모든 걸 이해할 수 있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어쩌면 부부싸움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고 말하는 부부는 위험하다. 내가 별로 노력하고 있지 않는데도 부부사이에 다툰 기억이 없다면 배우자가 얼마나 참고 배려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혼인의 서약으로 맺은 관계는 책임감을 부여하고 이해와 관용의 여지를 넓혀준다. 연애기간 동안 조율해 온 노력의 결과이거나 더욱이 자녀가 있다면 연인 사이보다는 서로를 향한 신뢰와 포용의 깊이도 다를 것이다. 그러나 이혼 소식이 점점 더 자주 들리는 건 이제는 참고 살지 않겠다는 의지로 다가온다. 그리고 과거 많은 경우에 순응의 주체가 여성이었다면 이제 여성은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비단 연인관계나 부부관계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철학자 랑시에르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모두가 평등하게 목소리를 가지고 있고 말할 수 있는 공평한 기회를 얻는다면 누구나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 갈등은 피하는 게 상책이라고 가르치며 소수의 목소리가 화합인 척 독점해 온 시대는 지났다. 떠나간 호시절이 그리운 듯 “암컷이 나와서 설친다”는 혐오 발언밖에는 내뱉지 못하는 한심함도 보인다. 각자의 사고와 인식이 극단적으로 다양하니 그런 개인들이 모인 사회는 갈등의 씨앗이 어디에나 산재한다.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이 많은 목소리가 들리는 민주주의는 시끄러울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참는 걸 택하기보다 목소리를 찾기 시작했다. 잘 싸우는 기술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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