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엑스포 실패에도 씩씩한 재계
배동진 서울경제부장
정치권 책임론…재계도 여진 계속
"사업발굴, 네트워크 확대" 긍정 평가도
국가적 행사와 경제성장 재계가 주도
엑스포 재수…다시 국민 뭉칠 기회
국가간 치열한 경쟁을 벌였던 ‘2030 세계 엑스포’ 유치전이 지난달 말 후보국간 투표에서 ‘119표(사우디) 대 29표(한국)’로 막을 내렸다. 정치권을 중심으로 참패 책임론이 불거지고 있는 가운데 재계도 ‘여진’이 만만치 않다.
막대한 시간과 경비를 들였지만 유치에 실패했고, 유치 활동 과정에서 국제박람회기구(BIE) 회원국들과 약속한 각종 투자·지원 등도 실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국내 12대 기업들이 주축이 된 부산 엑스포 민간유치위원회는 지난해 6월 출범 이후 무려 1600여 차례의 회의를 열었고 3000여 명의 해외 고위급 인사를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기업별로 BIE 회원국을 나누는 맨투맨 득표전략도 펼쳤다.
10대 그룹들은 지난해 대한상공회의소를 창구로 해서 엑스포 유치 활동비 명목으로 311억 원의 ‘특별회비’까지 냈다.
기업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엑스포 홍보에도 막대한 비용을 들였다. 삼성과 현대차, LG, 롯데 등은 대형 옥외광고나 버스 광고 등을 제작해 세계 주요 도시에서 부산 엑스포를 알리는 마케팅 활동을 벌였다. 국내 기업들은 해외 시장 비중이 워낙 커서 기업이미지 홍보 효과도 있다고 했지만 ‘과외비용’ 지출 성격이 강했다. 무엇보다 국내 기업들의 최근 실적을 보면 현대차그룹을 제외하고는 영업이익 감소에 마케팅 비용 삭감, 감원 등이 이어지고 있는 터여서 쉽지 않은 상황에서의 지출이었다.
문제는 유치실패만으로 이번 사태가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유치 과정에서 기업들이 국가별로 한 약속때문이다. 국내 대기업들이 자금력과 함께 분야별로 제조·IT·물류·자원개발 등에서 글로벌 수준의 기술력을 갖춘 만큼 이를 중동, 아프리카, 중남미 등 저개발 BIE 회원국에게 지원 또는 사업을 제안한 것이다.
기업들로선 약속 자체도 파기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겠지만 국가간 신뢰 차원에서 이행해야 한다는 분위기다.
이번 엑스포 결과의 투표 성향 분석을 한 정부 고위 관계자는 “기업들이 막대한 지원을 약속했지만 유럽과 북미, 일부 아시아 국가만 한국에 찬성표를 던지고 나머지 중동, 중미, 아프리카 국가들은 대부분 사우디에 몰표를 한 것같다”고 전했다. 겉으로는 한국지지를 다짐하고 뒤로 돌아서 사우디를 찍은 것이다. 이 같은 분석만 본다면 기업들이 ‘헛심’만 쓴 셈이 된다.
대한상공회의소도 “유치 설득 과정에서 부산을 지지한 국가들에 약속한 것들중 가능한 것들을 선별해 이행할 것”이라며 여운을 남겼다.
재계는 이 같은 유치 실패에도 씩씩한 모습이다.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다양한 사업 기회를 발굴하고, 진정성 있는 네트워킹 형성 등의 성과가 있었다”고 했고, 대한상의도 “국민의 단합된 유치 노력은 대한민국의 국가경쟁력을 한 단계 끌어올렸을 뿐 아니라 한국 산업의 글로벌 지평도 확대하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6일엔 윤석열 대통령과 함께 부산까지 찾아와 시민들을 격려했다.
일부 대기업들은 엑스포 유치활동 참여와 사우디가 천문학적 예산을 투입하는 네옴시티 사업건 참여 사이에서 적지않은 고민을 한 것으로도 전해졌다. 이번 엑스포 유치활동 과정에서 민간유치위원장을 맡았던 SK 최태원 회장을 제외한 주요 총수들의 엑스포 동정이 막판에 사라진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실제 공개활동만 안했을 뿐이고 물밑 활동은 치열했다. 삼성전자 이재용 회장은 반도체 불황에 따른 적자속에 경영 관련 활동에 전념해도 모자랄 판이지만 ‘삼성물산-제일모직 부당 합병 의혹’ 재판 받으랴 엑스포 활동하랴 바쁜 모습이었다.
이번 엑스포 유치는 실패했지만 1988년 서울올림픽과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2002월드컵과 부산아시안게임, 2005년 APEC 정상회의 등 글로벌 행사때마다 기업들의 지원사격은 눈부실 정도였다.
사실 1980년대이후 혼란한 정국속에서 한국의 성장을 이끈 주역은 정치인이 아닌 기업인이다. 주요 그룹들이 각 분야에서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덕분에 어엿한 선진국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다. 매번 정권이 바뀔 때마다 창조경제니 소주성(소득주도성장) 혁신성장이니 해서 어려움을 겪었지만 묵묵하게 걸으며 성과를 냈다.
일부에선 “국가적 행사에 정부만 나서면 되지 굳이 기업까지 동원해야 하냐”는 지적이 있지만 글로벌 강대국들사이에서 우리와 같은 ‘강소국의 생존법’은 달라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다. 국가적 중대사에 작은 손도 여럿이면 큰 손 못지 않은 힘을 낸다. 부산엑스포가 재수의 길을 걷는다면 또 한 번 우리 국민이 뭉칠 기회가 아닐까.
배동진 기자 djbae@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