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승현의 남북 MZ] 남북 용어의 분단, 그 극복이 먼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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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신대 교양학부 교수(통일학·경영학)

남북한 일상 언어 이질감 갈수록 심화
언어의 벽 민족 소통 막는 장애 요소
젊은 세대 아름다운 우리말 공유하길

북한이 고향인 필자는 다른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17세 무렵 군에 입대했고 비무장지대에서 근무했다. 입대 전까지 한국에 대한 정보는 ‘남조선(한국)은 미국의 식민지이며 불쌍한 동포들을 해방해야 한다’는 당국의 공식 논리와 ‘한국이 실제로는 북한보다 발전되고 훨씬 잘살고 있다’ 등의 장마당(시장)을 통한 비공식 정보가 전부였다. DMZ에 배치된 첫날 육안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던 남쪽의 생경했던 풍경은 분단이 빚어낸 이질화를 인정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곧 남측에서 켠 대북 방송을 통해 우리는 한민족이 맞다는 양가적 감정이 자리했다.


당시 남과 북은 비무장지대를 중심으로 대북 확성기와 대남 확성기 방송을 전개했는데 남쪽에서 보내는 방송의 모든 내용이 기막히게 뇌리에 박혔다. 물리적 분단도 이념적 거리도 민족의 언어만은 가를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마침 내가 맡은 보직이 심리전 방송 담당이어서 DMZ에서 근무하는 내내 방송과 전단을 통해 한국에 대한 정보를 꽤 알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한국에 도착한 날 저녁 KBS 뉴스를 보는 순간 알아들을 수 없는 내용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뉴스, 앵커, 여당과 야당, 슈퍼마켓이나 핸드폰과 같은 일상적 용어들은 처음 접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대북 방송과 전단은 북한 주민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북한에서 쓰는 용어로 교정하여 보냈다. 분단이 만든 고도의 심리전이었다.

다시 시간이 흘러 한국에서 대학교수가 된 후 ‘북한 용어의 이해’라는 교양수업을 개설했다. 예상외로 수강 신청이 바로 마감됐고 인원을 더 늘려 달라는 요구를 받을 정도였는데 한민족의 용어가 달라야 얼마나 다를까 하는 순진한 생각이 낳은 예상 밖의 현상인 것 같았다. 이질적인 DMZ에서 남측의 방송으로 민족의 동질성을 막연하게 느꼈던 내 경험의 데자뷔라 할 수 있다. 수업이 시작되고 수강생들의 당황스러운 표정을 아직 기억한다. 다음 학기에도 똑같은 수업을 열었는데 처음만큼 폭발적이지는 않았다. 수업을 수강했던 어느 학생의 반응에 따르면 외국어 수업 하나를 새로 공부하는 경험이었고 학점과 취업이 중요한 학생으로서는 학점조차 쉽지 않다면 취업에 필요한 영어나 다른 외국어 수강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충분히 이해됐다. 필자 또한 북한에서 한국에 온 후 전부 다시 배우는 심정으로 정착을 시작해야만 했다.

한국에 정착한 탈북민 대상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72% 이상이 남북의 상이한 용어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답이 나왔다. 또한, 한국에서 사용하지 않거나 이질적으로 변한 ‘북한어’는 무려 6만 3000개에 달한다는 통계도 있는데 여기에 북한에서 더는 사용하지 않는 ‘남한어’의 숫자를 합하면 남북한 언어의 이질화와 그 심각성은 당연해 보인다. 아마 남과 북의 언어 이질화도는 생활 용어는 50% 이상, 그리고 전문 학술 용어는 70% 이상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이런 추세라면 단일민족을 규정하는 가장 기초적 요소인 언어까지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남북 용어에 대해 강의를 하다가 통일이 되면 나는 통역사라도 할 수 있어서 굶어 죽을 일이 없다고 얘기하지만, 사실은 씁쓸한 뒷말이다.

한민족 용어의 분단을 차치하더라도 사실 우리 안에서의 의사소통도 쉽지 않다. 외래어와 유행어는 기본이고 자고 나면 신조어와 은어가 쏟아지고 줄임말과 비속어가 난무하며 합성어나 인터넷 용어를 배우고 초성과 이모티콘도 익혀야 소외당하지 않는 현실에 살고 있다. 그 현상이 얼마나 빠른지 이제는 청소년과 MZ세대조차 간극이 크다. 그러니 기성세대는 이들을 더 이해하기 어렵고 세대 간의 벽은 높아지고 갈등은 깊어진다. ‘한글 파괴’가 위험 수준에 달한 작금에 세종대왕이 오시면 통역사를 대동하셔야 할 것이라는 말에 마냥 웃을 수만은 없다. 한글이 회복되고 상대를 조금은 배려하는 언어 사용이 필요한 시대이다. 세대를 중심으로 쌓아 왔던 암호체계와 같은 벽부터 허물다 보면 민족의 소통도 가능한 날이 올 것이다.

이미 비무장지대 북쪽의 MZ세대(장마당 세대)는 한국의 드라마·영화, 가요 등 한류 콘텐츠가 유통되면서 말투와 용어는 물론 생활양식까지 바꿀 정도로 분단을 두드리고 있다. 물론 이에 대처하여 북한 당국이 ‘반동사상문화배격법’을 제정하여 북한판 MZ세대에 대한 단속과 처벌을 강화하고 있지만 빠르게 확산한 서울 말씨와 용어를 뿌리 뽑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왕이면 그들에게 한국의, 민족의 좋은 용어가 전해졌으면 좋겠다. 언어가 늘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진화하고 변화해 온 풍토임을 생각하면 수천 년 동안 이어 온 민족의 유구한 역사와 아름다운 우리말을 향한 남북한 MZ세대의 역할이 매우 중요한 시기임은 틀림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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