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여는 시] 해질녘(채호기(19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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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하게 구워진 공기의 색깔들

멋지게 이륙하는 저녁의 시선

빌딩 창문에 불시착한

구름의 표정들

발갛게 부어오른 암술과

꽃잎처럼 벙그러지는 하늘

태양이 한 마리 곤충처럼 밝게 뒹구는

해질녘, 세상은 한 송이 꽃의 내부

- 시집 〈수련〉(2002) 중에서

한 송이 수련으로 이 우주가 피어있음을 느꼈다면 그의 시선은 얼마나 크고 깊은 것일까? ‘세상은 한 송이 꽃의 내부’라는 말을 들여다보고 들여다보아도 그 직관적 통찰의 폭이 잡히지 않아 아련함만 가득할 뿐이다. 시는 신비와 여운을 통해 한없는 황홀경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따뜻한 붉음’은 무엇일런가? 아궁이에서 타오르는 따뜻한 불은 우리를 몽상에 잠기게 한다. 우주를 타오르게 하는 아궁이가 있다면 그것은 ‘해질녘’일 것이다. 노을은 ‘따뜻하게 구워진 공기의 색깔들’을 거느리고 몽롱한 에테르로 풀려, 취기에 젖은 눈길로 세상을 보게 한다. 이때 세상은 몽유도원경. 그러한 경계의 마음으로 ‘저무는 태양’을 바라보면 그것이 우주를 ‘뒹구는 한 마리 곤충’임을 알게 된다. 천지가 하나의 신비한 생명체가 되어 꽃피는 순간, 시는 그 놀라운 찰나를 담아내는 정지 화면이다.

김경복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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