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과연 정의로운가, 동물에게도…

김종열 기자 bell10@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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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을 위한 정의 / 마사 너스바움

인간의 법·철학 이용해
동물들의 정의를 대변
친숙한 동물뿐 아니라
모든 동물 삶 존중해야

<동물을 위한 정의> 표지. <동물을 위한 정의> 표지.

정의(正義). 한국인이 유달리 사랑하는 단어.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유독 한국에서 많이 팔렸다는 게 우연은 아닐 터. 정작 한국사회에서 이를 실제로 찾아보기란 제법 힘들다. 그래서 더 좋아하는 것일지도. 올바른 도리. ‘정의’에 대한 정의(定義)다. 올바름이란 무엇인가. 꽤나 명쾌할 것 같지만 사실 너무 애매한 개념이다.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오히려 잘 알 테다. 책을 읽고 정의가 뭔지 더욱더 알 수 없어졌다는 것을.

샌델의 정의는 사회적이다. 개인과 공동체가 어떻게 가치관을 공유하고 자원과 권리를 분배하느냐에 집중한다. 인간적이다. <동물을 위한 정의>는 그러한 가치관의 문제를, 자원·권리의 분배 문제를, 인간뿐 아니라 동물의 영역으로 확대한다. 더이상 우리는 정의라는 올바름의 기준을 고민할 때 인간만을 중심으로 고민해서는 안된다. 동물 역시 정의로운 대접을 받아야 한다. 인간만의 정의로움도 어려운데, 동물에게까지 정의로워야 한다는 이 초인간적인 사상에 조금은 숙연해진다.

인간의 경우 기본적으로 서로가 동등하다. 대체로 두 사람의 이익보다 더 중요한 한 사람의 이익은 없다. 자연히 다수의 이익을 중요시하는 공리주의로 이어진다. 물론 공리주의가 다 옳은 것은 아니다. 다수의 이익을 위한 소수의 희생은 정의롭지 않다.

정의로움의 저울 위에 동물까지 올려놓으면 이야기가 복잡해진다. 우선, 서로 동등한 것인지에서부터 합의점을 찾아야 한다. 두 사람의 이익보다 더 중요한 한 사람의 이익은 없지만, 두 마리 개의 이익보다 한 사람의 이익이 더 중요하다고 말할 사람은 많다. 심지어 동물끼리도 동등하지 않다. 많은 사람이 개고기 식용과 소고기 식용을 같은 저울로 판단하지 않는다.

그러나 <동물을 위한 정의>는 오히려 명쾌하다. 물론 동의하느냐의 여부는 별개다. 저자는 ‘미국의 대표적 지성’이라는 명성(미국 모 재단이 매년 선정하는 ‘세계 100대 지성’에 두 차례나 뽑혔다)에 걸맞게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다양한 법과 철학을 동물을 위해 사용한다. 그러면서 동물 학대자는 물론 기존 동물 애호가까지 얼마나 잘못된 방식으로 동물을 다루었는지 꼬집는다.

우리는 여러 이유로 동물 사이에 등급을 나누고 차별을 행한다. 개나 고양이는 인간과의 연대감이 깊다는 이유(많은 고양이들이 50대 중년 남성으로부터 “마누라, 자식보다 낫다”는 말을 매일 듣는다)로 식용화로부터 살아남고, 어떤 철학자는 “돌고래가 고급 인지능력과 감정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돌고래를 다르게 대우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저자는 사람들에게 말한다. 당신의 고양이 ‘메리’를 사랑하는 만큼 길고양이도 사랑해야 하며, 심지어 다른 들짐승에게도 애정을 보여야 한다고.

저자에 따르면, 동물 각자의 삶의 형태가 가진 다양성을 존중하고 (인간과의 관계와는 무관하게) 모든 다양성에 같은 무게의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 정의다. 심지어 인간까지 포함해서다. 명쾌하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동의하느냐의 여부는 별개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식량 부족, 의약품 부족 등으로 죽어가는 세상에서 다른 동물을 돌보는 데 상당한 시간과 돈을 쓰는 것이 과연 정의로운가. 저자의 주장은 내 기준을 너무 앞서 따라가기 버거운 감이 있지만, 주장을 펼치는 논리(인간의 법·철학을 동물에 적용하는 능숙함)는 재미있다. 챕터를 구분하는 고래 이미지 외 어떠한 이미지도 없이 글자만 빼곡한 500페이지가 넘는 책이 쉽게 넘어갈 정도로. 마사 너스바움 지음/이영래 옮김/알레/512쪽/2만 5000원.


김종열 기자 bell10@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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