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희와 함께 읽는 우리 시대 문화풍경] 야만의 시대를 건너는 길
부산대 대학원 예술·문화와 영상매체협동과정 강사
〈길가메시 서사시〉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산물이다. 동서양의 접경지이자 비옥한 초승달이라 불리는 풍요의 땅에서 길어 올린 문학이다. 우르크의 왕 길가메시는 반인반신의 영웅이다. 무소불위의 힘을 지녔으나, 친구 엔키두의 죽음 앞에서 인간의 무력함을 깨닫는다. 엔키두는 악행을 일삼던 길가메시를 벌하기 위해 신이 창조한 존재다. 짐승들과 어울려 살던 그를 여사제 샴하트가 문명화시켰다. 엔키두는 우르크로 가는 길에서 술과 빵을 맛보고는 흥에 겨워 노래를 부르며 옷을 입게 된다. 발효음식, 노래와 옷으로 상징되는 문화 경험이 그를 야만에서 문명의 세계로 이끌었다. 샴하트가 엔키두에게 속삭인다. “당신은 이제 지혜로워졌어요.”
문명이란 인류가 이룩한 지혜의 산물이다. 범박하게 말하면 물질과 기술의 진보에 힘입은 삶의 양태를 말한다. 그런데 문명과 야만의 관계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가령 3만 년 전 절멸한 네안데르탈인은 언어 구사, 협력과 소통 능력이 미약한 원시인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조직적으로 사냥하고, 홀로 생존하기 어려운 개체를 공동체에서 돌보기도 했다. 매장문화를 고려하면 사후세계에 대한 관념체계를 지녔으며 무덤에 꽃을 뿌려줄 만큼 낭만적이었다. 과연 이들을 야만인이라 할 수 있을까. 오늘날 문명사회는 어떠한가. 고도의 물질문명을 누리면서도 약탈과 학살을 정당화한다. 기후위기가 초래한 재난, 차별과 혐오가 일상화된 지도 이미 오래다. 타인의 고통은 단순한 구경거리로 전락하고, 가짜뉴스가 곳곳을 활보한다. 호모 사피엔스가 이룩한 문명의 시대는 차라리 야만에 가깝지 않은가.
발터 벤야민은 문명의 기록치고 야만의 기록이 아닌 것이 없다고 진단한다. 문명의 야만은 홉스가 정의한 만인이 만인에게 적이 되는 자연상태보다 훨씬 더 공포스럽고 폭력적이다. 종착지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무한 질주하는 문명의 열차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자간나트(Jagannath) 마차와 무엇이 다르랴. 이 야만의 세기를 어떻게 건널 수 있을까. 엔키두는 문명화의 대가로 자연의 친구들을 잃었으며, 길가메시가 영생을 찾아 헤맨 끝에 얻은 깨달음이란 유한한 생에 대한 뼈아픈 자각이 아니었던가.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이즈음, 정작 소중한 가치를 잃어가며 끝내 채워지지 않을 욕망을 좇아 끝없이 진군하는 우리네 삶의 자리를 뒤돌아본다. 우정의 연대, 소통과 공감의 가치가 자본의 논리와 욕망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지거나 표리부동의 비열한 작태를 일삼는 현실을 흔치 않게 목도하지 않았던가. 우리 속에 깃든 욕망과 야만의 민낯을 고통스럽게 응시하는 일, 야만의 시대를 건너는 지혜의 출발점이 아닐까. 공존을 위한 따뜻한 환대와 수평적 연대로 나아가는 그 길에서 “당신은 얼마나 지혜로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