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비평] 대통령의 명예 훼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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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호 부산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명예교수

대선 후보 시절 보도로 언론사·기자 압수수색
강제력 동원 때 정치 실종되고 민주주의 흔들려

한동안 잊고 지냈던 권위주의의 망령이 어른거리고 있다. 한 해 내내 ‘방송 장악’, ‘언론 탄압’, ‘공영방송 붕괴’ 등 험악한 단어들이 언론계를 흔들어 놓았다. 특히 지난 몇 달간 검찰이 ‘대선개입 여론조작 사건’ 특별수사팀까지 꾸려서 언론사 5곳, 전현직 기자 7명을 압수수색한 일은 초유의 사태로 꼽힌다. 지난 대선 무렵 부산저축은행 부실 수사 의혹을 제기한 뉴스타파 등의 관련 기사로 당시 담당 주임검사이던 윤석열 대통령이 명예 훼손의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 사유였다. 이 사건은 공인의 의혹 검증 기사에 대해 당사자이자 국가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이 범죄로 규정하고 형사책임을 묻겠다며 나섰다는 점에서 여러 가지 논란거리를 던져준다.

대통령실이나 검찰이 이 보도를 명예 훼손으로 규정했다는 사실은 해당 보도의 사실성에 대한 부정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이 사건과 관련해 진실이나 ‘사실성’이란 여러 가지 유형으로 구분해볼 수 있다. 첫째는 보도에서 당사자로 지목된 대통령과 검찰이 생각하는 사실성이 있고, 둘째는 언론보도가 추구하는 사실이, 셋째로는 법적 판단에서 인정하는 사실성이 존재한다. 문제는 용어는 비슷해도 이 세 가지가 지향하는 사실이 상당히 다르다는 데 있다.

우선 사건 당사자인 대통령은 자신이 사건 전모에 대해 제일 잘 안다고 생각할 것이고, 이 때문에 ‘부당한’ 언론 보도의 피해자라고 판단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대통령은 아직 전모가 밝혀지지 않은 사건 관련 인사 중 한 명이며 더구나 당시 공인인 후보자 신분이었다. 후보자 검증이란 사안의 공익성을 감안할 때, 설혹 보도 과정에서 사실적 오류가 일부 발생할지라도 의혹 제기와 검증 자체를 막을 수는 없다. 특히 수사 주체로 나선 검찰은 의혹 제기 대상인 대통령 휘하의 국가 기관이자 사건에 연루된 또 다른 이해 당사자다. 공인 역시 사실 규명과 명예 회복에 나설 수는 있지만, 검찰의 공권력 동원 방식은 여러모로 부적절하다.

그 다음으로 언론이 추구하는 사실은 상식적인 사실성과 조금 다르다. 언론은 권력이 은폐하는 비리에 의문을 갖고 파헤치려 한다. 특히 시간에 쫓기는 상황에서 한정된 정보와 취재원에 의존해 기사를 작성할 수밖에 없다. 기사에서 사실성 여부는 취재원의 신분이나 진술 맥락을 감안할 때 내용이 믿을 만한가 하는 판단에 근거한다. 타사 보도 역시 신뢰성 있는 취재원이 되기도 한다. 언론 보도에서 사실성이란 과학 지식처럼 오랜 숙고와 검증 후의 결론이 아니라 잠정적이고 부분적인 판단 과정일 수밖에 없다. 이 점을 감안하면 이번 보도에서 처음 의혹을 제기한 뉴스타파 뿐 아니라 이를 인용 보도한 MBC, JTBC, KBS 등 다른 방송사에 대해서까지 방송통신심의위가 징계 조치를 내린 것은 국가 기관의 보복성 권력 행사로밖에 볼 수 없다.

이 때문에 여러 선진국에서는 공익적 사안에 대해서는 사후에 사실 오류가 드러나 명예 훼손이 발생하더라도 가급적 책임을 묻지 않는 경향이 있다. 미국에서 공인 보도에 적용되는 ‘현실적 악의(actual malice)’론이 대표적인 예다. 공인 보도에서 설혹 오류가 드러나더라도 이 오류가 악의를 갖고 의도적으로 자행되지 않는 한 명예 훼손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악의성 여부를 입증하는 책임은 공인에게 있다. 국내에서도 공인이 연루된 사안에 대해서는 비슷한 원칙을 적용하고 있다.

언론의 공인 비판 보도에 관대해야 하는 이유는 법이 갖는 한계와도 관련이 있다. 법은 법리와 증거라는 제한된 틀 안에서 판단할 뿐 우리가 기대하는 진실과 정의를 구현할 수는 없다. ‘대통령 명예 훼손 사건’ 역시 검찰이 법정에서 실제로 유죄 판결을 이끌어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렇지만 이 조치는 차후 언론에 위축 효과를 발휘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우려스럽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의 2023년 언론인 조사에 의하면 언론 자유를 제약하는 요인으로 정부·정치권을 지목한 비율은 조사 대상자의 50%에 달했는데, 이는 2년 전에 비해 17.6%나 증가한 수치다. ‘가짜 뉴스’와 ‘대선 여론 조작’ 근절을 표방하고 나선 검찰과 대통령실의 행보에 우려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특히 대통령 자신이 ‘규정’한 진실 구현을 목표로 정해 놓고 법의 강제력을 동원하기 시작하면, 정치는 실종되고 민주주의는 흔들릴 수밖에 없다.

미국 역사상 최초로 탄핵 위기에 몰려 사임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비극은 임기 내내 언론을 적대시하고 통제하려 한 데서 시작됐다. 언론의 혹독한 비판과 감시를 감내하는 것 역시 대통령이란 직책의 핵심적인 부분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한 해가 저물어간다. 새해에는 영원한 검사 윤석열이 아니라 좀더 정치인다운 윤석열의 모습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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