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질한 초식남의 ‘흑화’를 막아라

김종열 기자 bell10@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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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성으로 산다는 것 / 스기타 슌스케

남성 중심 사회에서도
'약자 남성' 또한 존재
고통의 경중 겨루는
'약자 올림픽' 멈춰야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성으로 산다는 것> 표지.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성으로 산다는 것> 표지.

새 책을 담은 박스들이 매주 문화부로 배달된다. 책 박스를 ‘언박싱’할 때면 아이처럼 설렌다. 이번 주엔 젠더 관련 두 권의 책이 눈에 들어왔다. 한 권은 여성 차별에 대한 일종의 고발서다. 다른 한 권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성으로 산다는 것>이란 책이었다. 선택은 후자다. 이유는 지난달 진주의 한 편의점에서 발생한 사건 때문이다. 20대 남성이 머리가 짧다는 이유로 편의점 여성 아르바이트생을 무차별 폭행했다. 범행 당시 술에 취한 남성은 “여성이 머리가 짧은 걸 보니 페미니스트”라며 “나는 남성연대인데 페미니스트는 좀 맞아야 한다”고 했다.

“이유가 그렇다면 더더욱 여성의 차별을 다룬 책을 골라야 하는 것 아니냐” 물을 수 있다. 실제로 고발서의 작가는 서문에 ‘짧은 머리 여성을 페미니스트라며 폭행하는 사건과 메갈 집게손 소동이 다시 일어나는 것을 보니 이 책이 할 일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고 썼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20대 남성 폭행범 쪽이 더 궁금했다. 도대체 무엇이 이 남자를 이토록 화나게 만들었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성으로 산다는 것이 이런 황당무계한 분노를 부를 만큼 가혹한 것인가.


여성의당 경남도당 경남여성회가 지난달 9일 창원지검 진주지청 앞에서 편의점 폭행 피의자에 대한 강력처벌 등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부산일보DB 여성의당 경남도당 경남여성회가 지난달 9일 창원지검 진주지청 앞에서 편의점 폭행 피의자에 대한 강력처벌 등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부산일보DB

책은 ‘약자 남성’에 관한 에세이다. 저자는 우리 사회(저자가 말하는 ‘사회’는 일본 사회이지만, 한국 사회와 그다지 다를 바 없다)가 남성 중심 사회임을 인정한다. 남성이 여성보다 더 많은 혜택을 누리고, 여성은 ‘유리천장’ 아래에 갇혀 있다.

다만 저자는 모든 남성이 ‘다수 강자’에 속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상대적 약자는 어느 상황에서나 존재한다. 경제적 빈곤, 추한 외모, 권력 사슬의 하위 단계에 위치한 남성들에게 “당신은 이 사회의 특권층”이라고 쏘아붙인다면, 과연 그들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일까.

‘이제는 정말 끝이다, 비참하고 허무하고 슬프다,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을 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손을 뻗으면, 이성과의 연애로 구원받길 바라거나, 유명인이 되는 인생 역전을 꿈꾸거나, 이민자 혐오나 인셀(involuntary celibate, 비자발적 싱글) 또는 안티 페미니즘 투사로 흑화하는 변변찮은 선택지밖에 없다면? 남은 선택지가 이것뿐이라면…?’ (본문 중에서)

저자는 어떤 측면에선 약자 남성이 일반적으로 소수자라 불리는 여성, 장애인보다 더 소외될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소수자에게 직면한 차별이 ‘정의롭지 못한 것’이라면, 약자 남성이 겪는 능력·학력을 둘러싼 격차는 ‘굴욕적인 것’이다. 사적 영역이며 자기 책임의 문제로 취급된다. 소수자는 차별의 부정의를 공개적으로 비판하지만, 약자 남성은 차별의 굴욕을 내면으로 삭일 뿐이다. 그렇게 굴욕은 개개인의 내면에 감정적 왜곡을 쌓는다.

약자 남성들의 흑화는 그렇게 이루어진다. 저자는 이러한 흑화 메커니즘의 보편적 예로 토더 필립스 감독 영화 ‘조커’(2019년)의 주인공 아서 플렉을 꼽는다. 맞다. 우리가 아는, 고담시에 사는 그 조커다.


영화 ‘조커’ 포스터. 영화의 주인공 아서 플렉(일명 ‘조커’)은 ‘약자 남성’이 어떻게 블랙 히어로로 변화하는지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부산일보DB 영화 ‘조커’ 포스터. 영화의 주인공 아서 플렉(일명 ‘조커’)은 ‘약자 남성’이 어떻게 블랙 히어로로 변화하는지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부산일보DB

그렇다고 책은 결코 약자 남성들의 흑화를 정당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흑화를 막기 위한 방법을 모색한다. 저자는 ‘남자답다는 갑옷’ 속에 상처 입은 마음을 숨겨두지 말라고 조언한다. 자신을 방치하거나 혹은 애써 참다 쌓아둔 감정을 폭발시키지 말고, 평소 고통과 상처 일부를 조금씩 꺼내 일상에서 공유하라 말한다.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 약함을 받아들이고, 남자답게 참지 말고, 싫으면 싫다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분명히 말하라 한다.

남자가 더 유리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약자 남성과, 같은 사회에서 살아가는 여성이 서로 적대할 이유 따윈 어디에도 없다. 누가 더 고통스러운지를 따지는 작업이 굳이 유의미한가. 모호하고 경계가 불분명한 영역에 선을 그어 우열과 선후를 가리려는 행위 자체가 잔혹한 폭력일 수 있다. 누가 더 고통스러운지 대결하는 이른바 ‘약자 올림픽’은 그만 둘 때다. 너의 고통과는 별개로 나는 고통스럽고, 나의 고통과는 별개로 당신의 고통은 존중받아야 한다. 찌질(?)한 약자 남성을 위한 추천서. 특히 나 스스로에게 정말 필요한 책이다. 스기타 슌스케 지음/명다인 옮김/또다른우주/236쪽/1만 6800원.


김종열 기자 bell10@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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