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한 해의 끝과 한 시대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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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석 문화평론가

'서울의 봄'… 비극적 역사 떠올려
현재도 과거 반복 낙관 어려워
청년층 '울분'은 희망 불씨
권력에 사로잡힌 '왕' 경계해야

어느덧 시간이 흘러, 2023년 12월도 약 1주 정도만 남아 있다. 이 시점이 되면 사람들은 비슷한 감회에 빠지면서 다소 근엄해지기까지 한다. 이렇게 한 해가 가고 있다는 생각에 착잡한 심회에 빠져드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한 해 동안 자신이 무엇을 했고, 또 무엇을 하지 못했는지를 자연스럽게 돌아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올 12월은 개인적인 시간뿐만 아니라 깜짝 도래한 역사적인 시간으로 더 분주해 보인다. 오랜만에 천만 관객을 향한 쾌속 질주를 시작한 영화 ‘서울의 봄’은, 안 그래도 무거워지는 이 시간에 44년 전 그토록 착잡했던 그날의 시간까지 겹쳐놓고 말았다. 이 영화는 어처구니없었던 한 시대의 종말이 그만큼 어처구니없을 또 다른 시대의 시작으로 이어지는 비운의 교체기를 조명하면서, 한 시대를 마무리하고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제목 ‘서울의 봄’은 이 영화에 반드시 어울린다고 할 수 없다. 적어도 1980년 봄의 상황을 생각하면 그러하다. 총칼과 군홧발로 세상을 짓밟은 세력은 다시 1980년 서울의 봄을 처참하게 짓이겼고, 이어지는 광주의 5월을 피로 물들였다. 한 독재자가 만든 세상은 다른 독재자의 세상으로 무난하게 이어졌고 부마(부산과 마산)에, 서울에, 광주에, 그리고 한반도 전역에 씻을 수 없는 슬픔을 남겼다. 영화 ‘서울의 봄’은 암흑이 암흑을 낳는 시대의 한 단면을 통해, 역사의 불행이 어디에서 시작되고 민중의 고통이 어디로 번져가는지를 보여 주었다.

상념에서 깨어나니, ‘서울의 봄’이 상영되는 영화관 안은 어느새 훌쩍인 소리들로 조금씩 시끄러워지고 있었다. 전두광이 이끄는 신군부는 그들이 아버지처럼 신봉하던 죽은 왕의 권력을 거의 손에 넣었고, 이에 저항하는 이들의 불꽃은 서서히 꺼져가고 있었다. 아마도 그날 이후의 삶을 경험하지 못했을 요즘 세대들에게도, 그 불꽃의 사그라짐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해 보이는 것 같았다.

학생들은 이 작품을 보면서 울분을 느꼈다고 말하곤 한다. 그들의 말은 그날의 상황을 몇 번이나 돌이켜 보아야 했던 이들에게는 작은 희망처럼 느껴질 것이다. 눈앞의 인생에 바빠 세상과 타인의 삶에 무관심했던 세대들이 하는 말이어서 더욱 그럴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살아갈 세상에서는 아마도 더 큰 비극은 없을 것이라고 믿고 싶어서, 설령 그러한 비극이 생기면 젊은 세대들이 막을 것이라는 작은 희망의 불씨를 볼 수 있어서 그럴 것이다.

하지만 2023년 12월의 대한민국은 그렇게 낙관할 수만은 없는 곳이다. 1980년 서울의 봄은 1987년으로 이어졌고, 이후에 몇 번이나 되살아나 대한민국을 위기로 몰아넣은 소위 ‘그들의 왕’을 위협했다. 어떤 왕들은 그 자리에서 내려와야 했기도 했지만, 어떤 왕들은 그 자리에서 버티며 더 큰 망령으로 살아나기도 했다. 더 큰 문제는 그들의 왕이 사라진 다음에도 다음 왕이 대기하고 있고, 언제인지 모르게 그들은 다시 왕의 자리로 귀환하곤 했다는 사실이다. 왕이 된 그들은 한결같이 행동해 왔다. 자신이 옳고, 자신의 가족이 옳고, 자신의 측근이 옳다고 말이다.

2023년 12월 한국도 그러한 상황은 아닌지. 가뜩이나 한 해의 마무리로 바쁠 이 시점에서 44년 전의 이야기까지 겹치면서 착잡한 감회와 근엄한 심회를 놓을 길이 없어졌다. 그럼에도 세상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는 왕들에게, 자신 이외의 권력을 무가치하게 여기며 세상을 자신의 발밑에 놓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독재자들에 대해 지금이라도 이렇게 발언할 수는 있을 것 같다. 시간이 가면 사람들은 무엇을 하지 못했고 무엇을 했어야 했는지를 생각한다고. 2024년의 시작은 2023년의 이 어둠을 몰아낼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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