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문’이 열렸다 … 한국은행 금고미술관 첫 공개
감시 복도·이중 벽 등 철통 보안
‘가장 가깝고, 가장 은밀한 역사’
내년 2월 26일까지 개관전 진행
고가의 미술품을 금고에 보관한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그런데 미술관 자체가 금고라면 차원이 다른 문제다. 그것도 화폐를 찍어 내는 권한인 발권력을 가진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의 지하금고가 미술관이 되었다니…. 2023년 12월 23일, ‘비밀의 문’이 일반인에게 처음으로 열렸다. 1963년에 건립된 구 한국은행 부산본부 지하금고가 부산근현대역사관 금고미술관으로 변신해 첫 전시를 개최한 것이다.
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가자 철제의 금고 문이 이미 열려 있었다. 영화에는 지하터널을 파서 은행 금고에 침투하는 장면이 가끔 나온다. 한국은행 금고는 핵공격에도 안전하게 설계되었다니 일찌감치 포기하는 게 낫겠다. 화폐를 보관하는 지하 1층 금고실은 4개의 금고로 되어 있었다. 한 일자(ㅡ)자형의 복도에서 각 금고로 출입이 가능한 구조였다. 감시 복도로 금고실을 둘러싸고 이중 벽체로 만드는 등 보안에 단단히 신경을 썼다. 보안용 철창은 으스스한 느낌을 더했다. 부산시는 이 건물을 인수해 리모델링을 할 때 지하금고의 내부 구조 및 특징을 그대로 유지하고, 금고 공간의 특수성이 잘 나타난 시설물과 창호를 최대한 보존하도록 공사를 했다.
이번 전시는 ‘가장 가깝고, 가장 은밀한 역사’라는 주제로 작가 14명의 작품 51점이 금고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 아무래도 한국은행 금고였던 곳인 만큼 돈과 관련한 작품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정안용 작가는 종이로 만든 지폐를 이용해 가변설치했다. 정 작가는 청년 예술가로서 경제적인 어려움을 고민하면서 ‘돈 작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김구 선생의 얼굴이 들어간 가상의 10만 원권도 인상적이었다. 손형호 작가의 작품명은 ‘부산(富山), 부산(釜山)’이다. 손 작가는 부산에 오기 전에 도시명만 듣고 부자 도시를 상상했지만 살아 보니 그렇지 않았다고 했다. 작품 속 모델의 표정처럼 씁쓸해진다. 이민걸 작가는 1971년에 건물 뒤편으로 지하금고를 증축할 당시에 사용한 벽돌을 이용해 만든 작품을 선보였다.
금고미술관 기획·운영을 담당하는 이창훈 아트디렉터는 “이번 전시의 취지는 거대 서사뿐만이 아니라 개인의 미시 서사도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아픈 가족사가 녹아 있는 문지영 작가의 ‘Happy Happy Birthday’가 가장 부합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페문을 수집해 만든 김수진·정찬호 작가의 ‘아무도 살지 않는다’, 최원규 작가가 독거노인들이 사는 집에서 가져온 장판을 이용한 ‘망각의 각인’도 인상적이었다. 멋진 지하 신세계를 만났다.
1층 한국은행 아카이브실에는 ‘화폐 지설물 의자’가 두 개 있다. 지설물은 오염되거나 훼손되어 사용할 수 없는 화폐를 작게 자른 것이다. 각각 만 원과 오만 원권 지설물을 채워 넣어 만든 의자다. 진짜 돈방석에 앉으니 대체 얼마가 들었을지 궁금해진다. 1층에는 한국은행 객장 구조를 살려서 만든 카페 까사부사노도 입점해 있다. 시그니처 메뉴인 ‘한국은행 오리지날 라떼’를 마시며 옛날 모습을 상상해 봐도 좋겠다. 이번 전시는 내년 2월 26일까지 이어진다. 글·사진=박종호 기자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