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자에게 건넨 책과 현금…더 따뜻한 건 ‘판사의 위로’
부산지법 동부지원 박주영 부장판사 '미담'
피고인에 “사회보장 제도 속에서 살길” 당부
부산의 한 판사가 50대 노숙인 피고인에게 선고 직후 따뜻한 위로와 함께 책과 현금을 건네 화제다. 27년간 고물을 주우며 묵묵히 생계를 유지하다 우발적으로 범죄에 휘말린 노숙인이 다시 사회에 정착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부산지법 동부지원 형사1단독(부장판사 박주영)은 지난 20일 특수협박 혐의로 기소된 남성 A 씨에게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하고 보호관찰 2년을 명령했다. A 씨는 지난 9월 28일 오전 1시께 부산의 한 편의점 앞에서 노숙인 동료 B 씨와 함께 술을 마시다 말다툼을 하게 되자 손수레에 보관하던 칼을 꺼내 위협한 혐의를 받는다.
판결 전 조사에 따르면, A 씨는 칼을 드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어 칼을 밟아 부러뜨렸다. A 씨는 “손수레에서 술자리까지 약 4m가 떨어져 있어 B 씨는 칼을 든 자기 모습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이를 목격한 시민의 신고로 A 씨는 경찰에 체포됐고, 주거가 일정치 않은 탓에 구속됐다.
박 부장판사는 선고 직후 A 씨에게 “앞으로 생계를 어떻게 유지하느냐”며 “주거를 일정하게 해 사회보장 제도 속에 살고 건강을 챙기라”고 당부했다. A 씨에게 중국 작가 위화의 <인생>이라는 책과 현금 10만 원을 주면서 “나가서 상황을 잘 수습하고 어머니 산소에 꼭 가봐라”고 덧붙였다. 이날 법정에 있던 한 시민은 “우리 사회에 이런 판사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감동스러웠다”고 말했다.
박 부장판사는 “평소 독서를 좋아하는 A 씨에게 책을 줬고, 그날 한파였는데 당장 현금이 없는 것으로 보여 고민 끝에 하루 이틀 정도는 찜질방에서 자라고 현금을 줬다”고 밝혔다.
박 부장판사는 지난 10월 A 씨 공소장을 받은 후 보호관찰소에 ‘판결 전 조사’를 의뢰해 그의 삶을 면밀히 들여다봤다. 통상 피고인이 구속되면 가족이나 지인이 재판부에 탄원서가 들어오는데 A 씨는 그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A 씨는 초범이고 피해자 역시 처벌을 원치 않았고, 적극적으로 개입하면 A 씨가 달라질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고 설명했다.
경남 출신인 A 씨는 부모가 사망한 후 30대 초반 부산으로 넘어와 노숙 생활을 시작했다. 부산 전역을 다니며 27년 동안 폐지나 고철 등을 수집해 생활했다. A 씨는 휴대전화도 없고, 주민등록 호적도 말소될 정도로 철저히 고립된 상황이었다.
박 부장판사는 이번 판결이 개인적인 미담으로만 다뤄질까 봐 극도로 조심스러워했다. 그는 “법복을 입는 순간 스스로가 형사사법 절차이기 때문에 평소 엄격하게 재판을 진행하는데, 따뜻한 법관으로만 비칠까 걱정스럽다”며 “무명에 가깝던 사람이 법정에 선 순간 형벌과 함께 사회적 관심이 들어간다면 제2의 범죄에 휩쓸리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박 부장판사가 형사 재판에서 겪은 소회를 담아 쓴 책인 <어떤 양형 이유>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혹한에 박스며 신문지로 겨울을 나는 사람들이 있다. 한겨울 눈을 털며 들어선 지하도가 생각보다 훈훈하다면 겨울밤 지하도를 온몸으로 덥힌 사람들을 한번 떠올려봐야 마땅하다.’
김성현 기자 kksh@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