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갑진년 부산의 새 판 짜기

권상국 기자 ksk@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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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국 정치부 차장

엑스포 불발 이후 집단 냉소주의 안될 말
총선 이전까지 정권 차원 배려 이어질 때
글로벌허브도시, 산은법 의지 더 보여야
총선 후보 부산 현안 기여도 체크는 필수

아껴둔 비상금으로 금융 상품에 투자한 적이 있었다. 한 1년 묵혀두면 괜찮은 수익이 나오겠다 싶어 친구에게도 소개했다. 평소 점잖던 이 친구는 내 권유를 듣자마자 그 상품이 수익을 낼 수 없는 이유를 앉은 자리에서 열 가지 넘게 쏟아냈다. 그가 금융과 국제 정세에 그렇게 해박한 식견을 갖고 있는 줄 그날 처음 알았다. 몇 달 뒤 뜻하지 않은 호재를 만난 그 상품은 우리 부부에게 새 냉장고와 좋은 추억을 선물했지만, 나는 차마 그 사실을 그에게 알리지 못했다.

사소한 부조리에도 피가 끓던 청년 시절엔 그렇게 이성적으로 보이던 냉소주의자들이다. 그런데 엑스포 유치가 불발되자 ‘부산이 무슨…그럴 줄 알았다’며 앙천대소하는 이들을 보니 그 시절 안목이 부끄러웠다. 나이 들면 멀리해야 할 것 중 하나가 부정적인 사람이란 말이 요즘처럼 와닿는 시기도 없다.


물론, 엑스포 유치전의 참담한 결과는 전국을 큰 충격에 빠뜨렸다. 그간 제대로 된 보고를 못 올린 정보 라인과 외교 라인에 대한 혹독한 문책도 필요해 보인다. 그러나 이런 비판이 부산의 근원적인 역량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져서는 안 될 말이다.

‘레드팀’은 자신을 적군으로 가정해 아군의 상황 대처 능력을 점검하는 게 임무다. 그러나 종종 레드팀 역할에 심취해 진짜 내부에서 총질을 하며 비웃음을 사는 이들이 있다. 우린 보통 그걸 레드팀이 아니라 ‘내부의 적’이라 부른다.

스텝이 꼬인 부산은 이들 내부의 적을 달랠 게 아니라 새 판부터 짜야 한다. 엑스포 유치라는 큰 투자가 실패했으니 남은 시드머니를 확인하고 생존을 위한 전략을 모색하는 게 급선무다. 동네 분식점처럼 ‘오늘부로 부산시 문을 닫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라고 A4 용지 한 장 덜렁 붙이고 끝낼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나마 올해 부산시 국비 예산 확보가 수월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온다. 현장에서는 ‘누가 지금 이 분위기에 부산 예산에 입을 댈 수 있겠느냐’는 소리까지 나왔단다. 엑스포 유치는 불발로 끝났지만 그 명분으로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기 위해 땀 흘리는 이들이 있어 고맙다.

엑스포가 가져다줬을 파급효과는 아쉽지만, 다행스럽게도 유치 불발에 따른 정권 차원의 우호적인 분위기는 남았다. 하지만 이 분위기의 유통기한도 길어봐야 내년 총선까지다.

부산시가 빠르게 꺼내든 글로벌허브도시 프로젝트는 그래서 이 시기를 넘기면 안 된다. 단순한 특구를 넘어 교통과 교육, 의료, 관광 전 분야에 걸쳐 특례를 담아내는 특별법으로 ‘패자부활전’에 돌입해야 한다. 벌써부터 중앙부처에서는 북항 재개발 2단계 사업에 메스를 대겠다는 소리가 나온다. 그간 달갑지 않은 협조를 해왔는데 엑스포도 불발된 마당에 슬슬 부산의 여론과 의지를 간 보겠다는 의미다.

총선 전까지 짧은 기간 내에 부산이 새로운 남부권 경제 축으로 도약하겠다는 의지를 보여도 모자랄 시점에 신세 한탄은 안 될 말이다. 400만을 바라던 부산시 인구는 지난 10월 330만이 무너졌다. 자신은 오늘도 하루 대충 수습하며 살면서 ‘노인과 바다만 남은 도시’라며 여기저기 손가락질하던 그 집단 패배주의가 남긴 우울한 현실이다.

제22대 국회의원 선거가 해가 바뀌면 100일 앞으로 다가온다. 그런 의미에서 부산 유권자가 취해야 할 자세는 더 명확해졌다. 당장 지역구 의원과 후보를 상대로 그간의 공과를 따져볼 시점이다.

엑스포 유치 불발의 아픔이 있었고, 에어부산 분리매각은 시급하고, 산업은행법 개정도 난관에 부딪혔다. 어느 하나 쉬운 게 없는 난제가 ‘삼재’처럼 몰려든 부산의 2023년이었다. 과연 부산에서는 누가 엑스포 유치전에서 책임감 있게 나섰고, 누가 에어부산의 해법을 고민했고, 누가 산업은행법 개정에 헌신했을까. 조금만 신경 써서 뉴스만 살펴봐도 옥석은 금방 가려진다.

뒤집어 보면 더 쉽다. 누가 엑스포 국면에 팔짱 끼고 있었는지, 누가 ‘여의도 사투리’를 쓰며 부산의 노력을 깎아내렸는지, 누가 아무런 역할도 없이 공천을 자신하는지만 보면 된다. 그가 바로 ‘노인과 바다 시즌2’를 열어젖힐 후보다.

영화 ‘서울의봄’이 1000만 관객을 넘어섰단다. 청년 하나가 ‘전두광이 대통령 된다’는 말에 ‘왜 영화도 못 봤는데 스포일러를 하느냐’고 화를 냈다는 우스개 글을 봤다. 현대사 인식에도 냉소가 넘쳐나는데 후대라고 관심을 갖고 살았을까.

군부 사조직은 부산 7선 출신 민선 대통령의 손으로 해체됐고, 위대한 도시 부산과 부산 시민이 큰 역할을 했다고 이야기해 줘야 한다. 부산은 그렇게 남루하고 무기력한 도시가 아니다. 올 한 해 어렵사리 깨운 부산의 야성을 다시 잠재우는 우를 범하지 말자.


권상국 기자 ksk@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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