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촛불 소녀’에서 ‘개딸’까지… 호명의 성 정치학
변정희 (사)여성인권지원센터‘살림’ 상임대표
부산 동구 범일동에는 ‘누나의 길’이 있다. 이 길은 안창마을에서부터 이 부근에 걸쳐 살고 있던 여공들의 출퇴근길이었다고 한다. 조선방직과 신발 공장으로 별을 보고 출근했다가 별을 보고 퇴근하며 하루 14시간 이상의 고된 노동을 견뎌 낸 길이기도 하다. 이들은 우리나라 경제 발전의 주역이기도 했다. 한번은 부산을 방문한 지인이 이 길을 걸으며 여성 노동자들의 땀과 노동을 기리는 길의 이름이 왜 누나의 길인지 물었다. 유관순 열사가 한때 ‘유관순 누나’라고 불렸던 것처럼, 남성 주체가 중심이 되어 호명해 온 관행적인 시각이 부산의 역사를 아로새긴 길 이름 위에도 그대로 반영된 것이 아닐까.
이름 붙이기는 정치적인 행위이며, 수많은 정치적인 해석을 낳는다. 기존 우리 사회의 언어는 가부장적인 의식을 잘 반영하고 있다. ‘신사 숙녀’나 ‘선남선녀’는 남성형 호칭이 먼저지만, 동물을 가리키는 ‘암수’나, 노비를 가리키는 ‘비복’처럼 상대적으로 열등한 것으로 여겨지던 호칭을 사용할 때는 여성형 호칭이 먼저 온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김 여사’ ‘맘충’ ‘된장녀’라는 주로 여성을 대상으로 한 멸칭은 21세기에도 여지없이 벌어지는 여성 비하적인 이름 붙이기로 비판받았다. 한때 여성 인디 뮤지션을 ‘홍대 여신’이라고 불렀는데, 음악으로 평가받는 여성 뮤지션으로서는 정작 이 호칭이 달갑지 않았다.
‘유관순 누나’ 남성 중심 호명 관행
‘김 여사’ ‘된장녀’ 여성 대상의 멸칭
이름 붙이기는 지극히 정치적 행위
배타적 강성 팬덤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양아들’ 비해 ‘개딸’만 부각되는 현상
여성 혐오의 문법 아닌지 성찰해 봐야
여성 노동자의 길은 누나의 길이 되고 ‘안중근 형’은 존재하지 않지만 유관순 누나는 존재하며, 정작 유관순 언니라고는 불리지 않는 현실은 과거 여성이 주체로 인식되지 못해 왔음은 물론, 현재까지도 공적 영역에서 여전히 사적인 호칭으로 불리는 현상을 잘 보여 준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은 여성 인권운동가이지만 여전히 할머니로 불린다. 정치권에서도 이런 현상은 여지없이 반복된다. 2008년 광우병 쇠고기 문제가 큰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을 때 전국적으로 촛불시위가 벌어졌다. 이때 등장한 명칭 중에 ‘아줌마 부대’와 ‘촛불 소녀’가 있다. 촛불 소녀는 청계광장과 서울시청 일대에서 시작된 촛불 문화제에서 가장 먼저 촛불을 들고 나온 10대 청소년들을 일컬었다.
최근 정치권에 오르내리는 가장 대표적인 호칭은 이른바 ‘개딸’이다. 전국적으로 퍼져 나간 촛불시위의 시발점으로 촛불 소녀가 상징적으로 떠올랐다면, 개딸은 최근 정치권에서 강성 팬덤 정치의 상징적 용어로 불리고 있다. 처음 개딸은 드라마 ‘응답하라 1997’에서 나온 용어로, 더불어민주당의 20대 여성 지지층을 가리키며 ‘개혁의 딸’인 개딸로 유쾌하게 바꿔 불렸다. 한편 20대 남성 지지층은 ‘양심의 아들’이라는 뜻에서 ‘양아들’로 불리기도 했다. 한때 민주당 지지층에서는 “개딸은 촛불 소녀의 역사적 재부상”이라고 추어올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강성 지지자들이 당 내부에서 다른 의견과 입장을 표명하는 의원들에 대해 문자 폭탄을 돌리고, 신상 털기를 하거나 겉과 속이 다르다는 의미로 ‘수박’이라는 멸칭을 붙여 가며 수박 깨기 운동을 하는 등의 과격한 행태가 도마 위에 올랐다. 개딸에 대한 SNS에서의 언급량은 4배 이상 뛰어올랐고, 언론에서도 하루가 멀다 하고 과격한 행동을 벌이는 지지자들을 개딸로 명명하고 나섰다. 개딸로 불리는 20대 여성 지지자들의 활약이 압도적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개딸은 민주당 당원 200만 명 중 겨우 3~4% 정도인 20대 여성들을 가리키는 말이었지만 어느새 민주당의 강성 지지층 전체를 아우르는 대명사로 쓰이게 된 것이다. 이런 현상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개딸이라는 명칭이 극단적 강성 지지층을 가리키는 멸칭이 되는 동안에 양아들은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는 것도 흥미로운 점이다. 급기야는 개딸이라는 용어를 처음 만들었다고 알려진 더불어민주당 대표 팬카페 운영자가 개딸 명칭을 더 이상 쓰지 말 것을 요청하고 나섰다.
정치학자 박상훈은 한국의 민주주의가 다원적인 가치와 이념을 포괄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기보다 그 반대로 지극히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팬덤 정치로 귀결된 이유에 대한 깊고 넓은 고찰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정치가 강성 팬덤의 장으로 변질되고 있는 현상은 반드시 성찰하고 개선해야 할 정치적 과제다. 그러나 동시에, 개딸이라는 호칭으로 통칭해 온 현상 자체에 대한 성찰이 언론이나 사회 전반에서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것이 아쉽다. 과격한 정치 지지자들이 개딸로 호명되는 사회적 현상 역시 여전히 남아 있는 여성 혐오의 다른 문법이 아닌지, 손쉽게 비난의 대상으로 돌릴 수 있는 명명의 성(性) 정치학은 아닌지에 대한 성찰도 필요하지 않을까. 공적 공간을 살아가는 여성이 여전히 누나이거나, 소녀이거나, 할머니이거나 개딸인 한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