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의 시선] 강제동원 피해 배상 대법원 판결 이후
여전히 호응 없는 일본, 한일 관계 다시 뇌관 될 수도
피해자들은 제3자 변제안 계속 거부
배상금 공탁도 법원이 모두 불수리
향후 대법원 최종 결정 여부 가늠자
불인정되면 현재 해법 무너질 수도
일본은 한국 정부에 해결 거듭 촉구
반면 일본 측 노력은 현재까지 전무
국내 비판·일본 외면, 양쪽서 압박
현재 양국 관계 뒤흔들 가능성 여전
지난 21일 대법원이 일제강점기 강제노역에 동원된 피해자와 유족들이 미쓰비시중공업과 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피해자들의 손을 들어 준 원고 승소 판결의 여파가 계속되는 분위기다. 2018년 대법원의 1차 배상 확정판결 이후 일본 기업의 위자료 지급을 결정한 두 번째 최종 결론이 나면서 일본 전범기업들에 대한 배상 책임 인정은 우리 대법원의 입장으로 거의 굳어진 느낌이다. 대법원의 연이은 원고 승소 판결은 현재 비슷한 사안으로 계류 중인 약 70건의 관련 소송에도 큰 영향을 끼칠 전망이다.
특히 일제의 강제노역에 대한 최종 판결은 우리나라 정부와 일본 정부 간 과거사 문제에 대한 합의의 틀을 근본부터 뒤흔들 가능성이 높다. 지난 3월 우리나라 정부가 일본 정부와 합의한 ‘제3자 변제안’은 물론 이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불거진 대위변제 공탁 문제가 최대 관건이다. 이 때문에 일부 전문가들은 우리나라 정부의 해법이 안팎으로 궁지에 몰리면서 한일 관계마저 다시 변곡점을 맞을 수도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제3자 변제 기금도 부족
2018년에 이어 두 번째로 대법원이 일본 전범기업의 위자료 지급을 판결했음에도 피해자들이 현실적으로 직접 배상을 받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일본 정부의 변함없는 완강한 입장도 그렇지만, 지난 3월 이미 우리 정부가 한국 기업의 출연금을 바탕으로 대신 지급한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이른바 ‘제3자 변제안’인데, 1965년 한일기본조약에 따라 수혜를 입은 포스코 등 국내 기업이 출연한 기금을 행정안전부 산하에 설치한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의 이름으로 배상금을 지급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 방식은 피해자들이 재단의 배상금을 순순히 받아들인다는 전제가 있어야 유효하다. 피해자들이 이를 거부할 경우 추가로 법적인 문제가 불거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우리 정부의 제3자 변제 방식의 딜레마가 여기에 있다.
지금까지 제3자 변제를 위해 지원재단에 모금된 액수는 41억 원가량이다. 이 중 2018년 판결에 따라 제3자 변제안을 수용한 피해자 11명에게 25억 원가량이 지급되고, 16억 원 정도가 남았다. 그런데 당시 승소한 원고 15명 중 생존자 2명을 포함한 4명은 이를 계속 거부하고 있지만, 이들의 몫으로 약 10억 원을 할애하고 나면 잔금은 5억 원에 불과하다. 올해 2차 판결에 승소한 11명의 배상금까지 고려한다면 기금 액수 자체가 크게 모자라는 형편이다.
‘대위변제 공탁’은 계속 제동
지원재단의 기금 부족보다 더 큰 문제는 피해자들이 정부의 제3자 변제를 계속 거부하고 있다는 점이다. 배상과 관련해 전범기업은 물론이고 일본 정부의 어떠한 사과도 없는 상태에서 우리 정부가 조성한 기금을 받는다는 것이 피해자 입장으로선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 정부가 택한 우회로가 법원에 배상금을 맡기는 대위변제 공탁이다. 공탁은 채무자가 채권자가 아니라 법원에 돈을 맡김으로써 빚을 갚은 것으로 인정해 주는 제도다. 정부가 분명하게 제3자 변제금의 수령을 거절하는 피해자들에게 채무 변제 이행의 결과물을 얻기 위해 법적 절차를 활용한 것이다.
그런데 정부의 이런 시도는 법원에 의해 모두 막힌 상태다. 지원재단을 통해 변제금을 공탁하려던 시도는 법원에 의해 모두 거절당했다. 이 같은 불수리 결정에 불복해 법원에 12차례나 이의신청을 했지만, 역시 단 한 건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가해 기업이 불법 행위 자체를 부인하며 피해자에 대한 손해배상 채무를 인정하지 않는 상황에서, 신청인(재단)이 제3자 변제를 통해 판결금을 변제한 뒤 가해 기업에 구상권을 행사하지 않으면 가해 기업에 면죄부를 주게 되는 결과가 발생한다.” 지난 8월 수원지법 안산지원이 결정문을 통해 밝힌 기각 사유이다. 피해자들이 제3자 변제금 수령을 거절하는 이유와 같은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미뤄본다면 공탁 제도를 활용하는 방안은 실패했다고 여겨진다. 결국 현재 진행 중인 관련 항소심이 대법원까지 가서 최종 결론이 나와야 해결될 것이다. 어쨌든 법원의 변제금 공탁 거절과 이의신청 기각만으로도 정부의 제3자 변제 방식이 큰 타격을 받은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일본은 “한국 정부 책임” 떠넘겨
대법원 판결 이후 우리 정부의 입장만 더 궁지로 몰리는 모양새다. 제3자 변제 방식을 비판하던 국내 여론은 물론 일본 정부로부터도 유·무형의 압박을 받고 있는 형편이다.
일본 정부는 대변인을 통해 한국 대법원의 판결이 한일청구권협정에 명백히 반하는 것이라며 제3자 변제 방안에 따른 우리 정부의 해법을 촉구했다. 또 주일 한국대사관 정무공사를 초치하며 거듭 압박을 가했다. 외교가에서는 이를 두고 상대국 사법부의 판결에 대한 공개적인 거론 자체가 논란이 될 수 있고, 또 상대국에 부담을 지우는 의도라고 해석한다. 여기에 우리 정부는 제3자 변제의 이행을 계속 노력하겠다고 대응했다.
우려되는 점은 우리 정부가 앞으로도 계속 일본 정부의 이런 요구에 끌려갈 공산이 높다는 것이다. 현재로선 일본 정부나 전범기업이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물론 한국 내 여론을 위해 어떠한 ‘호응 조치’도 내놓을 가능성이 없다는 점이다. 지난 3월 박진 외교부 장관이 제3자 변제안을 발표하면서 “물컵에 비유하면 물의 절반이 찼다고 생각한다”며 일본 정부와 기업의 호응을 유도했지만, 지금까지 일본은 단 한 방울의 물도 보태지 않고 있다.
이처럼 일본의 무대응에다 국내에서도 제3자 해법이 지지받지 못하고 계속 부정적 여론이 높아지면 현 정부의 대일 행보 자체가 큰 부담이 될 수 있다. 일방적인 양보에도 변하지 않은 일본의 무대응이 우리 정부의 대일 외교에 대한 불만으로 충분히 번질 수 있는 것이다. 기대했던 물컵의 반이 여전히 빈 채로 남아있을 경우 현재의 한일 미래 파트너십에도 부정적인 영향이 우려되는 대목이다.
최근엔 일본 내에서도 이를 주시하는 분위기다. 한국 정부가 법원 공탁을 계속한다는 입장이지만, 현 정부 임기 끝까지 이 문제가 어떻게 확정될지 불분명하고, 또 앞으로 승소할 원고 중 정부 방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사람이 더 늘 것으로 일본 언론 매체들은 예상했다. 특히 공탁 신청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방침이 한국 대법원에서 최종 확정되면 제3자 변제라는 틀 자체가 완전히 무너질 수 있다고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결국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일본 정부와 전범기업의 호응이 반드시 있어야 하지만, 현재 일본의 태도를 보아서는 이를 기대하기도 어렵다. 우리 정부가 통 큰 양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만 궁지에 몰리는 비상식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되면 안정적인 한일 관계는 기대하기가 어려워질 수 있다. kms01@busan.com
곽명섭 논설위원 kms01@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