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서경식 교수를 애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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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봉 부산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몇 년 전 도쿄에서 출판사를 경영하고 있는 재일조선인 2세를 만난 적이 있다. 그는 당대 재일조선인의 최고 지식인으로 서슴없이 서경식 당시 도쿄게이자이대학 교수를 꼽았다. 쟁쟁한 사람들이 많지만, 문제의식과 실천력에서 서경식 교수가 단연 으뜸이라는 것이었다. 내가 만난 제3세대 재일조선인 지식인들도 대부분 서경식 교수의 영향을 이야기했다. 1990~2000년대의 탈민족, 탈조국, 탈국민 등의 지적 분위기에서 서경식 교수는 다른 각도에서 민족, 조국, 국가를 다시 생각할 수 있게 해 주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올해 초 도쿄에서 오랜만에 서경식 교수를 만났다. 진지하고도 즐거운 분위기는 저녁 자리까지 이어졌고 서경식 교수 부부의 건강도 화제에 올랐다. 그런데 사모님의 상태를 설명하는 서경식 교수의 말이 대단히 인상 깊었다. 팔레스타인 등의 난민을 걱정하는 사모님에게 의사는, 남의 일은 모두 잊고 마음을 편하게 가지라고 조언했다는 것이었다. 서경식 교수는 바로 그 난민 문제가 아픔의 원인인데 어찌 잊을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그것이 어떻게 남의 일이냐는 거였다.

우리나라에서 미투 운동이 한창이고 일본에서도 유사한 사건이 일어났던 때,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한국과 일본의 미투 운동과 이에 관련된 여러 가지를 이야기하다가 서경식 교수는, 인문학자의 운명은 자신이 가르친 내용으로 후학들에게 공격받고 비판받는 것에 있다는 요지의 말을 했다. 묵직하고 둔중한 느낌이 뒷덜미를 강타했다. 언젠가 또 서경식 교수는 일본의 대학입시에서 문학 작품이 사라지고 있다며 심각한 우려를 드러내기도 했다. 우리나라 수학능력시험에서 문학 작품이 얼마만큼 출제되고 있는지 큰 관심조차 없던 나에게, 서경식 교수의 문제 인식은 안일한 나를 꾸짖는 경종이기도 했다.

서경식 교수는 그랬다. 언제나 진지하고 열정적이었던 서경식 교수는 내게 때때로 죽비 같았고 스승 같은 분이었다. 그는 재일조선인이라는 위치성으로 세상을 보려 했다. 그에게 재일조선인이란 특수하고 개별적인 존재가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나타날 수 있고 만날 수 있는 보편적인 존재였다. 재일조선인이 처해 있는 반난민의 위치가 오늘날 세계가 지닌 모순이 함축되는 자리였기 때문이었다. 그가 보여준 수많은 통찰은 어쩌면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프리모 레비의 고통에 치열하게 공감하고 팔레스타인 등의 난민 문제와 디아스포라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던 것은 이와 같은 위치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지난 18일 타계한 서경식 교수의 부음을 들었다. 너무나 갑작스럽고 충격적이었다. 올해 초 만났을 때는 불편한 정도였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의 모습은 여전히 생생하고 목소리는 귓가를 맴돈다. 그만큼 황망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워 며칠을 멍한 상태로 보냈다. 그러나 애도란 슬픔이나 우울의 감정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애도는 한편으로 그를 내 안에서 영원히 기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며 나는 언제든지 그를 불러내야 한다. 그가 가졌던 문제의식과 고통에 공감하는 태도를 끊임없이 되살려내는 것이 내가 마땅히 지녀야 할 애도의 형식인지 모른다. 머리 숙여 서경식 교수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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