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2023년, 우리는 왜 쇼펜하우어에 열광했나

김종열 기자 bell10@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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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에…> 5주 연속 베스트셀러 1위
관련 서적 여러 권도 동시에 순위권

“인생은 괴로움” 설파한 염세주의자
지난해 우리 삶도 힘들었다는 방증

2024년은 현실 만족하는 삶보다
나은 미래 꿈꿀 수 있는 한 해 되길

지난해 연말 서점가에는 때아닌 쇼펜하우어(1788~1860) 열풍이 불었다. 강용수 고려대 철학연구소 연구원이 쓴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라는 책이 5주 연속 베스트셀러 종합 1위 자리를 지켰다. 종합 순위 1위를 한 달 넘게 지켰다니, 마흔이 아닌 사람들도 꽤나 많이 읽은 모양이다. 〈남에게 보여주려고 인생을 낭비하지 마라〉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등 쇼펜하우어가 직접 쓴 책들도 덩달아 순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쇼펜하우어에 열광하게 하는가. 시작은 모 예능 프로그램에서 평소 ‘뇌섹남’으로 불리는 한 유명 배우가 〈마흔에…〉를 소개하면서부터다. 책 속 구절들이 자막으로 노출되기도 했다. ‘성공하고 싶다면 원하는 바를 가져라. 하지만 행복하고 싶다면 가진 것을 즐겨라.’ 성공보단 행복. 전자는 구태하며, 후자는 매력적이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 ‘소확행’과도 맞닿는다. 분명 해당 프로그램의 덕을 본 것 같다. 그러나 〈마흔에…〉뿐 아니라 쇼펜하우어 관련 서적 여러 권이 동시에 베스트셀러 순위권에 안착한 것을 고려하면, 단순히 해당 프로그램 덕분으로 설명하기에는 다소 부족하다.


염세주의 철학자. 비관론자. 괴팍한 노친네. 내가 아는 그의 대표적 이미지들이다. 쇼펜하우어는 인생을 ‘괴로움’으로 봤다. 모든 인생은 고통이다. 그에게 인생이란 즐기는 것이 아니라 견뎌내는 것이었다. 평소 “태어나지 않는 게 최선”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을 정도다. 그의 잠언집 제목을 되풀이해보자.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독설도 이런 독설이 없다.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200년 전 꼰대 독설가에 열광하게 하는가. 나는 생각한다. 2023년 한 해 동안 참 많은 사람들이 힘들었나 보다. 채 피지도 못한 청춘들이 ‘압사’당한 지지난 10월의 마지막날, 그날 밤 이후로 많은 부모들은 지금까지 줄곧 마음 한구석에 날카로운 쇳덩이를 품고 살아간다. 마음이 조금만 움직일라치면 아프게 베이고 또 베이지만, 그 쇳날은 당분간 왠만해선 무뎌지지 않을 듯 하다. 다른 한편에선, 꿈을 아껴 모은 전세금을 날려버린 사기 피해자들은 천길 낭떠러지 위에서 새해를 맞이하고 있다. 피해자 대부분이 20∼30대로, 많은 대학생·사회초년생·신혼부부들이 하루아침에 미래를 잃어버렸다.

그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특별한 사고가 없었던 서민들도 치솟는 물가에 어느 해보다 힘든 한 해를 보내야만 했다. 지난해 소비자물가는 3.6%나 올랐다. 2년 연속 3% 이상의 물가 상승을 경험한 것은 19년 만의 일이라고 한다. 특히 서민 체감이 큰 전기·가스·수도 물가는 20%나 올랐다. 힘든 상황은 미래를 설계할 여유조차 빼앗는다. 합계출산율은 사상 처음으로 0.6명대까지 떨어졌다. 미국의 한 교수는 “이대로라면 한국은 2750년 국가가 소멸할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다.

경제적 어려움뿐 아니라 정서적으로도 무척 힘든 한 해였다. 상식으론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았다. 수많은 젊은이의 목숨을 앗아간 사고의 책임 소재는 여전히 모호하고, 부실 건설사 부도를 막기 위해 수십 조 원을 아끼지 않으면서 전세사기 피해자들의 선보상은 1년 내내 미뤄지다 이제 겨우 법 문턱을 넘었다. 해볼만한 승부라 큰소리쳤던 2030년 엑스포 유치전은 119 대 29로 대패하고도 “졌잘싸”라는데, 무엇이 ‘졌잘싸’인지 당최 알 수 없다.

이 정도면 ‘인생은 고통이요, 이 세계는 최악의 세계’라는 쇼펜하우어의 말에 솔깃할 만도 하다. 가슴이 먹먹하다. 힘든 삶을 견디는 방법이 ‘좀더 나은 내일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아니라 ‘삶은 원래 그런 것’이라는 체념이라니. ‘성공하고 싶다면 원하는 바를 가져라. 하지만 행복하고 싶다면 가진 것을 즐겨라.’ 성공하고 싶어도 어차피 원하는 바는 가질 수 없고, 차라리 지금 가진 것에 ‘행복하다’ 자위하며 살라는 겐가. 현실은 참담한 대패였지만, “졌잘싸”라며 서로에게 최면을 건다. 우리는 행복하고 싶으니까. 그러나 차기를 노릴수록 오히려 아프게 진단해야 하는 법이다.

새해에는 많은 사람들이 쇼펜하우어의 (마지못해) 자족하는 삶이 아닌, 보다 나은 내일을 목표로 당찬 욕심을 부리는 삶을 선택했으면 좋겠다. 그런 선택이 무모하지 않은 대한민국이 되었으면 좋겠다. 올해는 세계 역사상 최초로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선거를 치르는 ‘선거의 해’다. 70개 이상의 국가에서 최소 20억 명 이상이 투표소로 향할 테다. 우리도 4월에 우리의 미래를 다시 선택해야 한다. 앞서 말한 대한민국을 만들어줄 제대로 된 일꾼이 국민의 선택을 받을 수 있기를, 그리고 다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를, 바란다.

김종열 문화부장 bell10@busan.com


김종열 기자 bell10@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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