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어사와 만해 깊은 인연, 1908~1943년 지속”

최학림 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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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만해 한용운과 범어사’
임제종·만세 운동 밀접히 관계
저작 <불교대전>, 범어사 발간
1938년 7층 석탑 비문도 지어

만해 한용운 동상. 만해기념관 제공 만해 한용운 동상. 만해기념관 제공
만해 한용운 진영. 만해기념관 제공 만해 한용운 진영. 만해기념관 제공

독립기념관 책임연구원을 지내고 불교평론 학술상 등을 수상한 김광식 전 동국대 특임교수의 ‘만해 한용운과 범어사’는 범어사와 한용운의 깊은 관계를 밝힌 최초의 논문이다. 지난 연말 나온 <세계불학> 제3호에 발표한 이 글은 “범어사와 만해 인연은 1908년부터 1943년까지 지속됐다”는 것을 밝힌다. 1908년은 만해가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 후 범어사에 머문 때다.

김 전 교수는 “1910년대 만해의 역사에서 범어사는 또렷하다”고 말한다. 먼저 “만해는 1911~1912년 임제종 운동과 관련해 범어사와 깊은 관계를 맺었다”고 한다. 만해가 주도한 임제종 운동은 한일병탄 직후 한·일 불교의 비밀 야합인 ‘조동종 맹약’을 분쇄하려던 불교 운동이다. 만해는 당시 임제종 운동에 적극 나선 범어사 주지 오성월 스님 등과 접촉하면서 범어사에 임제종 임시 종무원(1911년 9월)을 두었다. 김 전 교수는 “이때 만해 거주지는 ‘부산부 범어사’로 돼 있는데, 1911년 9월 이후 범어사에 (당분간)상주했다”고 주장한다.

‘범어사 경성 포교당’도 만해와 관계가 깊었다고 한다. 이곳은 1912년 5월 범어사와 만해가 주도해 ‘임제종 중앙포교당’(서울 인사동)으로 설립된 이후 그해 9월 일제 탄압으로 임제종 간판을 쓸 수 없게 돼 ‘범어사 경성 포교당’으로 이름을 바꾼 곳이다.

만해는 이곳의 주무, 포교사, 주임 등으로 불리며 1917년까지 활동하면서 후학들의 독립정신을 고취시켰다는 것이다. 범어사 경성 포교당은 3·1운동 직후 상해 임정과 국내 불교계를 연결하는 거점 역할을 했다고 한다.

중도에 큰 사건이 끼어든다. 1912년 9월 임제종 운동 좌절 후 만해는 만주 방랑을 떠나는데 도중에 친일 밀정으로 몰려 육혈포 세 발을 맞고 죽을 고비를 넘긴다. 구사일생으로 만주에서 돌아온 뒤 만해가 그해 12월 ‘부산부 범어사’에 요양한 사실이 만해의 서신으로 확인된다. “만해와 범어사의 관계는 그처럼 끈끈했다”는 것이다.

범어사에서 몸을 회복한 만해는 이듬해인 1913년 5월부터 1년여 통도사 안양암에 머무르며 통도사 강원의 강사로 나서고, 1914년 4월 팔만대장경의 정수를 가려 묶은 <불교대전>를 펴냈다. 특이한 것은 <불교대전>을 통도사에서 작업했는데도 만해는 ‘범어사 한용운’으로 자신을 명시했고, 발행소도 ‘범어사’였다는 점이다. 김 전 교수는 “<불교대전> 작업이 범어사 승려와의 대화에서 비롯됐고, 무엇보다 출간 비용을 범어사가 댔다고 봐야 한다”고 분석한다.

만해 한용운은 1908~1943년 범어사와 깊은 인연을 지속했다. 사진은 범어사 전경. 범어사성보박물관 제공 만해 한용운은 1908~1943년 범어사와 깊은 인연을 지속했다. 사진은 범어사 전경. 범어사성보박물관 제공

이어 김 전 교수는 “만해와 범어사 관계에서 하나의 정점은 1919년 3·1운동 때였다”고 지적한다. 각종 증언을 종합할 때 만해는 1919년 2월 하순, 범어사를 찾아와 주지인 오성월 스님에게 만세운동 거사를 사전에 알리고 도움을 요청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범어사의 주요 인물 7명(김법린 차상명 김영규 김봉한 김상헌 김상기 김한기)이 탑골공원 만세운동에 참가했고, 이어 이들이 다시 내려와 범어사 만세운동을 주도했다는 것이다.

만해와 범어사와의 특별한 동지적 관계 지속했다고 한다. 1926~1930년 서울 안국동 선학원이 ‘범어사 경성 포교당’으로 전환했을 때도 만해는 다시 이곳을 찾아 머무르며 <님의 침묵>을 출간하기도 했다. 특히 만해는 1930년 ‘범어사 경성 포교당’ 이름으로 중등교육기관을 인수해 운영했을 정도다.

만해와 범어사의 관계에서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1938년 당시 범어사 대웅전 옆에 건립한 7층 석탑의 비명(碑銘)을 만해가 지었다는 대목이다. 김 전 교수는 “비명은 당시 주지인 차상명이 범어사 회주격인 오성월의 동의를 얻고 만해에게 부탁해서 지은 것”이라며 “탑의 뒷면 범어사 승려 명단에 범어사 3·1운동의 주역 16인 이름이 나오는 점이 흥미롭다”고 말한다.

비명에 따르면 최범술이 일본 유학 중 인도 고승에게 얻은 사리 2과를 범어사 승려 동지 김상호의 간청으로 넘겨준 것이 결국 7층 석탑 건립으로 이어졌다. 김 전 교수는 “탑을 건립한 밑바탕 정서에는 최범술 김상호 오리산 차상명 한용운 등 3·1운동에 참여한 승려 출신 독립운동가들이 있었다”고 밝힌다. 그래서 비명에 범어사 3·1운동의 주역 이름을 일일이 새겼다는 것이다.

김 전 교수는 “1938~1944년 만해 말년의 삶도 범어사 인연이 깊었다”고 말한다. 범어사 승려 출신인 전각 대가 안광석의 생전 증언에 따르면 1938년 7층 석탑 비문을 지을 무렵, 만해는 범어사를 찾았다. 안광석은 그때 만난 만해를 스승으로 모셨다. 1943년 가을, 안광석은 범어사 내원암에 내려와 있던 만해를 모시고 범어사 말사인 기장 척판암에 갔다고 한다. 척판암에서 지은 만해의 즉흥시 2편이 있다는 사실도 그간 널리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라고 한다. 김 전 교수는 “만해와 범어사의 인연이 그렇게 많았던 연유 배경 성격을 종합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곧 근대기 범어사의 정체성과 연관이 된다”고 했다.


최학림 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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