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여는 시] 서시(序詩)
이성복(1952 ~ )
간이식당에서 저녁을 사 먹었습니다
늦고 헐한 저녁이 옵니다
낯선 바람이 부는 거리는 미끄럽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이 맞은편 골목에서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당신이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사방에서 새 소리 번쩍이며 흘러내리고
어두워 가며 몸 뒤트는 풀밭,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
키 큰 미루나무 사이로 잎잎이 춤춥니다
- 시집 〈남해 금산〉(1986) 중에서
새해다. 늘 한 해가 시작되면 새로운 삶이 펼쳐지길 바라는 차원에서 마음은 기대와 설렘으로 부풀어 오른다. 그러나 날이 거듭 굴러가도 삶의 모습은 예전과 다름없다고 느끼게 될 때, ‘늦고 헐한 저녁’이 어김없이 찾아온다. ‘사랑하는 사람’이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정처 없’는 삶을 계속 이어나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 끝과 시작을 알 수 없게 하는 지루하고 누추한 일상의 쳇바퀴!
그런 상황에 놓였을 때 우리는 삶의 금맥을 찾아 그리운 대상을 불러본다.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야말로 한 해가 가고, 한 해가 오는 길목에 변화와 활기를 불어넣는 살아있는 행동이다. 삶의 의미를 캐기 위해 애타게 부르는 목소리, 그 목소리. 사랑하는 사람을 영혼의 무늬로 새기는 일로 인해, 생활은 ‘키 큰 미루나무 잎잎이 춤추’는 생명의 약동으로 가득 차게 된다. 그렇기에 ‘서시’는 서원이다. 새해의 기도다. 김경복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