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불가사리와 영생
조선 후기 백과전서 〈송남잡지〉에 기괴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여러 전승 버전이 있으나 기둥 줄거리는 엇비슷하다. 여말선초에 쇠붙이를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는 괴물이 나타났다. 조정에서 이를 죽이려 했으나 죽일 수 없었다. 그래서 ‘불가사리(不可殺伊)’라 했다. 이희승의 〈국어대사전〉은 그 모습을 이렇게 그렸다. ‘곰의 몸에 코끼리의 코, 무소의 눈, 바늘 털, 범의 꼬리를 지닌 동물.’ 왕조가 바뀌는 역변의 시기였고, 잦은 외침으로 쇠붙이가 필요한 시대였다. 여기에 민초들의 고통이 뒤섞여 괴물로 상징화된 것으로 짐작된다. ‘송도(개경) 말년의 불가사리 같다’는 속담도 있는데, 무지막지하게 패악을 부리는 사람을 가리킨다.
같은 이름의 바다생물 중에도 불가사리가 있다. 쉽게 죽지 않고 조개·소라·해삼 등을 죄다 잡아먹는다는 점에서 전설의 불가사리와 유사하다. 불가사의한 것은 강력한 신체 재생력이다. 몸의 일부가 잘려도 다시 자라는데 잘린 일부는 재생되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별 모양의 새로운 성체가 된다. 불가사리는 유성생식이 아닌 무성생식을 선택했다. 짝짓기로 자손을 남기기보다 스스로를 무한 복제한다는 뜻이다. 유성생식은 변화무쌍한 자연에 대응한 진화의 결과물이건만 단세포도 아닌 불가사리가 이를 거부한다. 실로 기이한 존재다.
어쨌든 학계는 인간 노화 억제의 비밀을 풀 단서를 불가사리에게서 찾고 있다. DNA 염색체 끝부분에 있는 말단소체, 즉 텔로미어(telomere)를 보호하는 특정 효소가 그런 역할을 한다고 보고 연구 중이다. 불가사리는 이미 난치병 치료에도 활용돼 혈전, 고지혈증, 면역 증강에 좋은 의약품이 개발된 상태다. 불가사리 줄기세포 역시 치매 예방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끈질긴 재생력과 성장 촉진력 때문인데 해양바이오 영역에서 각광받을 만하다.
청정 수역인 남해 앞바다가 불가사리로 홍역을 앓는다는 안타까운 뉴스가 들린다. 물론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최근 한 환경단체가 경남 남해군 창선면 일대에서 해양복원 활동을 진행해 보니, 하루 반나절 만에 2.5t의 트럭을 가득 채울 만큼 바닷속은 불가사리 천지였다. 불가사리는 해양생물의 씨를 말리고 바다를 황폐화시키는 주범으로 몰려 있다. 해수면 온도 상승으로 몇 년 전부터 더욱 급증세다. 하지만 불가사리를 해양의 ‘악동’으로만 볼 일은 아니다. 인간이 그 장점을 찾아 긍정적 활용을 위해 노력을 좀 더 기울이는 한 해가 됐으면 한다.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