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게 바이올린 연주는 시시포스의 돌 같은 존재” [스테판 피 재키브 인터뷰]
5일 ‘부산 챔버 페스티벌’ 개막
지휘 없이 하루에 협주곡 2곡
멘델스존·모차르트 5번 기대
콩쿠르 입상 없이 12살 데뷔
하버드대 출신·피천득 외손자
실내악·솔리스트로 외연 넓혀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연주했습니다. 12살 때 런던에서 처음으로 협연한 곡이기도 합니다. 그게 벌써 25년 전입니다. 1년에 최소 4번 정도는 연주했으니까 100번은 넘게 연주한 것 같습니다. 그래도 어렵습니다. 연주마다 내가 설정한 수준까지 끌어올리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어요.”
지난 1일 부산에 도착한 한국계 미국인 바이올리니스트 스테판 피 재키브(39). 5일 부산문화회관 중극장에서 막을 올리는 ‘2024 부산문화회관 챔버 페스티벌(이하 부산 챔버 페스티벌)’ 개막 연주회에서 지휘자 없이 부산 체임버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와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 등을 협연할 예정이다.
스테판의 한국 방문은 코로나 팬데믹 기간이던 지난 2021년 안토니오 멘데스가 지휘하는 KBS교향악단과 같은 곡을 협연하기 위해 한국을 찾은 게 가장 최근이었으니 3년 만이다. 그 사이 스테판은 한국인 클라리네티스트 김윤아 씨와 7년 열애 끝에 결혼했다. 지금은 해체된 앙상블 디토 시절 제1 바이올린을 맡아 부산 무대에 선 적은 있지만, 콘체르토 연주로 부산 관객을 만나기는 이번이 처음이어서 더욱 기대가 크다.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은 드라마틱하면서도 마음 졸이게 하는 아름다운 선율이 있습니다. 모차르트가 고전적이라면, 브람스와 슈만은 로맨틱하고요, 멘델스존은 그사이 어디쯤 위치할 겁니다. 대중들이 이 곡을 좋아하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습니다. 모차르트 바이올린 협주곡은 작곡 스토리가 재밌습니다. 모차르트 아버지 레오폴드는 아들에게 왜 바이올린 협주곡을 만들지 않느냐고 말했고, 그 후 5개의 협주곡이 1년 사이에 한꺼번에 만들어집니다. 그중 ‘터키’라는 부제가 붙은 5번이 가장 드라마틱하고 기교가 화려하며, 구조적인 면에서도 이전과 가장 큰 대조를 이루고 있어서 좋아하는 편입니다.”
자신이 연주할 곡을 설명하는 데도 딱 부러지는 성격이 그대로 엿보인다. 부산 챔버 페스티벌 김동욱 예술감독은 “아주 이례적으로 두 개의 협주곡을 개막일 하루에 다 선보인다”고 밝혔다.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과 모차르트 바이올린 협주곡 제5번이다. 그만큼 어렵게 성사된 ‘빅 게스트’다 보니 주최 측에서도 욕심을 낸 듯하다. 스테판 역시 흔쾌히 수락했다. 하지만 알고 보니 하루에 두 곡의 협주곡을 연주하기는 스테판도 처음이라고 말했다. 그것도 지휘 없는 협연으로.
지난 3일 오후 부산대 음악관에서 처음으로 오케스트라와 합을 맞추는 그를 만났다. 스테판의 아내 윤아 씨도 이때만큼은 오케스트라의 클라리넷 연주자로 함께했다. 부산·대구·경북 등 시·도립 오케스트라에 몸담은 우수한 연주자 약 40명으로 재구성된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이지만, 스테판의 요구사항도 만만치 않았다. 좀 더 빠르게 혹은 더디게, 여리게, 강하게 등을 요구했다. 음악만큼은 한 치의 양보가 없어 보였다. 설렁설렁 대충대충 해치우는 법이 없었다.
스테판은 지금 미국 뉴욕 링컨센터 근처에서 살고 있지만, 보스턴 토박이로, 엘리트 코스를 탄탄히 밟은 ‘엄친아’였다. 대입 원서도 하버드대 단 한 곳만 응시할 정도로 자신감이 넘쳤다고 한다. 1학년 때는 프랑스문학을, 2학년 때는 심리학을 전공했으며, 3학년이 되어서야 음악에 집중하기 위해 전공(바이올린)을 바꾸었다. 하버드 졸업 후에는 뉴잉글랜드 음악원에서 최고 연주자과정을 마쳤다.
“아버지가 공부를 많이 강조했습니다. 바이올린도 사랑했지만, 공부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어릴 때부터 하고 있었고, 대학 시절만이라도 다양한 경험을 해 보고 싶어서 일반 전공으로 진학했습니다. 그래도 운이 좋았던 건, 특별한 콩쿠르 참가나 입상 경력 없이 오디션만으로 연주 기회를 얻을 수 있었으니까요.”
스테판은 탄탄대로를 달려 온 듯하다. 하지만 거저 얻어진 결과는 결코 아니다. 대학 1학년 때 읽은 알베르 카뮈의 에세이 <시시포스 신화>를 예로 들며, 자신에게 바이올린 연주는 하루도 빠짐없이 돌을 밀어 올리지 않으면 안 되는 시시포스의 삶과 같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전했다. 그에게 바이올린은 고통을 수반하면서도 하루도 빠짐없이 연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시포스의 돌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좋아하는 바이올린 연주자로 크리스티안 테츨라프와 기돈 크레머를 주저 없이 꼽은 점도 같은 맥락이다. 음악 본질에 충실한, 작곡가가 쓴 음악 그대로, 신중하게 표현하고자 애쓰는 그 모습이 좋아 보였기 때문이란다. “지성과 감성이 뛰어난” “흔하지 않은 음악적 본질”을 연주하는 모습이라는 평가도 그렇게 나온 것인가 싶었다.
스테판은 솔리스트 활동뿐 아니라 실내악에도 열심인 편이다. 혼자 하는 작업보다도 음악가 동료와 함께하는 작업을 즐기는 편이다. 앙상블 디토가 해체된 뒤에는 ‘JCT 트리오(JUCTION 트리오)’ 멤버로 활약 중이다. 제이 캠벨(첼로), 콘래드 타오(피아노)와 함께 결성한 피아노 트리오이다. 세 사람 모두 젊은 클래식 아티스트에게 수여하는 최고의 영예인 ‘에버리 피셔 커리어 그랜트’ 수상자여서 미국에서도 주목받는 앙상블이다. 스테판은 2002년 17살에 이 상을 받았다. 사라 장, 리처드 용재 오닐 등도 이 상을 받았다.
또한 스테판은 지난 2018년 창립한 하와이 실내악 축제(Hawaii Chamber Music Festival·HCMF) 예술감독을 맡아 2023년 가을부터 3년간 일하게 됐다. 올해는 코로나 기간 피아니스트 제레미 덴크와 함께 녹음한 찰스 아이브스의 바이올린 소나타 전곡 음반을 ‘넌서치’ 레이블로 발매할 예정이다.
마지막으로 시인이자 수필가, 영문학자 외할아버지 ‘피천득’ 선생에 대한 추억을 질문했다. 그러자 제법 긴 대답이 돌아왔다.
“부모님 두 분이 모두 물리학자였습니다. 제 예술적 영감은 돌아가신 외할아버지(피천득 수필가)로부터 물려받은 것 같습니다. 할아버지는 문학자였지만, 늘 표현 방식을 고민하셨던 분이고, 음악에도 조예가 깊으셔서 제가 열두 살이 될 때까지 거의 매년 여름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할아버지 댁에서 함께 들은 음악에 대한 기억이 생생합니다. 할아버지는 안네 소피 무터의 팬이셨는데, 당시 영어로 된 비디오 <아마데우스>는 하도 여러 번 보여주셔서 지금도 대사를 모조리 외울 정도입니다.”
결혼 후 가장 달라진 게 뭐냐고 묻자, 뜻밖에도 그는 “좀 더 인간적으로 됐다”고 말했다. 지금도 오전 9시면 알람 시계처럼 정확하게 바이올린 튜닝과 함께 하루를 시작한다는 스테판이 ‘엄친아, 하버드 졸업생, 훈남’에만 갇혀 있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한편 스테판은 5일 개막 연주에 이어 오는 12일엔 대니 구(바이올린), 앤드류 링(비올라), 요나 김(첼로), 김윤아(클라리넷)와 함께 듀오, 4중주, 5중주를 선보일 예정이다.
김은영 기자 key66@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