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산 작품 53편 아우른 ‘요산 문학지도’ 그려지다
작품의 모든 장소 150곳을
동래·낙동강 등 5개 권역화
권역별 ‘○○길’ 주제 정해
부산 권역은 유튜브 영상도
부산 문학의 뿌리이자, 한국 현대문학의 우뚝한 봉우리인 소설가 요산 김정한(1908~1996) 모든 작품의 문학지도가 최초로 만들어졌다.
요산김정한기념사업회 산하 요산문화연구소는 한국문화예술위의 ‘2023 한국작고문인 선양사업’의 결과물로, 최근 ‘요산 문학지도-김정한 문학의 길에서 사람살이를 읽다’를 제작 공개했다. 이 지도는 현재까지 알려진 요산의 모든 작품인 53편을 대상으로 한 성과물이다. 53편은 <김정한전집>(전5권)에 게재된 52편에, 지난 2016년 발굴된 단편 ‘길벗’을 추가한 작품 수다.
요산 문학지도는 53편의 모든 장소 150여 곳을 5개로 권역화하고 각 권역을 하나의 길로 주제화해서 32쪽으로 정리하고 있다(4쪽짜리 축약본도 있다). 5개 권역은 ‘동래 권역-사람다운 길’ ‘낙동강 권역-생명의 길’ ‘부산 권역-정의로운 길’ ‘남해 권역-회나무 길’ ‘확장 권역-시련·연대 길’이다. 권역별로 2~8개 소지역이 있으며, 그것은 총 25개에 이른다.
동래 권역은 요산의 고향 남산동이 있는 곳으로, ‘사람답게’로 나아가는 출발점을 이룬다는 점에서 ‘사람다운 길’이란 명칭을 붙였다. 3개 답사 코스도 제시했다. 동래 권역은 8개 소지역을 아우르는데 요산이 명정학교를 다니며 불교와 3·1운동을 육화한 ‘범어사’, 외가 처가 낙동강으로 이어지는 애달픈 고개인 ‘사밧재’, 동래고보를 수학하고 동아일보 동래지국을 운영한 ‘옛 동래읍’ 등이 포함돼 있다.
이번 문학지도는 요산 문학의 새로운 경계를 열어 보인다는 특별한 성과를 거뒀다고 한다. 우선 요산 문학을 상징하는 낙동강 권역의 경우, 통상 하구의 을숙도(절필 후 문학 향방을 잡은 낙동강 최남단)와 삼랑진 뒷기미나루(눈물 맺힌 비극적 정한의 나루터), 그리고 그 중간의 화제리(수난 역사를 담은 중편 대작 ‘수라도’ 마을) 등으로 쉽게 간추려졌다.
그러나 이번 문학지도는 낙동강 권역에서만도 6개 소지역을 요산 문학의 세부 장소로 제시했다. ‘대저와 구포’를 방점처럼 찍힌 살아 있는 정신의 거처(독메, 하느님 등)로, ‘물금 메깃들’을 벼랑 독메 농민저항을 아우른 요산 문학의 들판(산서동 뒷이야기, 사밧재, 평지 등)으로, ‘삼랑진~원동’을 가난과 고생의 외진 골짜기(축생도, 제3병동)로 추가 제시한 예가 그것이다. “낙동강 파수꾼으로 불리는 요산의 진면목을 심화 재발견했다”는 것이 요산문화연구소 측의 설명이다.
더욱 주목할 것은 부산 권역의 재발견이라고 한다. 여기서 부산 권역은 ‘전통도시 동래’의 대칭 개념으로 일제강점기에 도회지가 형성된 곳이다. 놀랍게도 부산 권역은 낙동강 권역(12편)을 제치고 요산 작품에서 가장 많은 25편의 장소로 나오는 권역으로 확인됐다. 시청 법원 감옥 병원 백화점을 비롯한 각종 통치·배제 기구가 집적한 곳으로, ‘설날’ ‘옥중회갑’ ‘지옥변’ ‘산거족’ ‘인간단지’ 등의 작품을 통해 요산이 치열하게 작품화했다는 것이다.
부산 권역에서는 제1원도심으로 서구, 중구, 사하·남·영도구, 제2원도심으로 초량~범일동, 서면 일대 등 모두 5개 소지역을 요산 문학의 세부 장소로 제시했다. 서구는 ‘근대 통제기구가 집적한 곳’으로, 중구는 ‘시청 백화점 신문사가 있던 원도심’으로, 초량~범일동은 ‘사람답게 살아가라 메시지 울리는 산복도로의 삶’ 등으로 요약돼 있다. 부산 권역은 식민 폐습과 반쪽 해방이 끈질기게 양산하는 차별 억압을 뚫는 길을 전망하는 ‘정의로운 길’로 이름 붙이고, 역시 3개 문학 답사 코스를 제시했다.
남해 권역은 요산이 젊은 시절 7년간 살았던 곳이자, 1936년 ‘사하촌’으로 등단한 곳이다. 푸른 해원을 배경 삼아 꼿꼿한 기상으로 서 있는 회나무가 남해 시절 요산 문학의 상징이다. 남해읍, 남해군 남면~고현면 등 2개 소지역이 있으며, ‘회나무 길’이란 이름으로 1개 문학 답사 코스를 제시했다. 요산문화연구소 측은 “해안 절경의 아름다움에 충분히 취할 수 있는 권역”이라고 했다.
마지막 다섯 번째 ‘확장 권역’도 장소적 확장을 또렷이 보여준다는 점에서 역시 요산 문학의 재발견에 값한다. 작품 ‘곰’에서는 전란의 상처와 한이 깃든 산청 지리산 골짜기까지 나오며, ‘길벗’에서는 새 나라 만들기의 열망·고난을 품은 부산-대구-거창-산청의 여정으로 장소가 영남지방으로 확대되고 있다.
요산의 유일한 장편 ‘삼별초’에서는 여성 인물의 고단한 도정을 통해 산청에서 강화도까지, 한반도 중·남부의 여러 장소로 더욱더 확대되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계절노동자와 위안부에 대한 첫 문학적 증언을 담은 작품 ‘오키나와에서 온 편지’에 이르러 동아시아로 확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온갖 시련이 결국 이름 없는 이들의 연대를 기약한다는 점에서 ‘시련·연대 길’로 주제화했다.
이재봉 요산문화연구소장은 “7명 연구원이 8개월에 걸친 세미나·답사의 공을 들인 ‘요산 문학지도’는 길과 장소를 통해 더 많은 시민들이 요산 문학에 다가설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특히 재발견된 부산 권역을 중심으로 만든 19분 20여 초의 ‘요산 문학지도 정의로운 길’ 영상을 신년부터 유튜브를 통해 공개 중”이라고 밝혔다. ‘요산 문학지도’ 제작에는 문재원 나여경 김요아킴 이미욱 양순주 연구원 등이 참여했다.
최학림 기자 theos@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