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달식의 일필일침] '촉석루 국가문화재 승격' 이젠 응답하라
논설위원
현재 경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
밀양 영남루 ‘국보’ 계기로 다시 촉발
걸림돌은 재건 때 이루어진 원형 훼손
진주시·경남도는 장기 계획 세우고
본질적 가치 더 발굴하고 주목해야
일본 금각사 재건 과정 우리도 배울 만
유유히 흐르는 남강의 푸른 물결이 더없이 깊게 느껴진다. 임진왜란 최고의 격전지 중 하나여서일까? 아니면 논개의 절개가 빛나서일까? 역사라는 지층이 고스란히 쌓여 있는 곳, 바로 경남 진주 촉석루(矗石樓)이다. 누각 현판의 촉(矗) 자에 눈길이 머문다. 곧을 직(直) 자 3개가 합쳐서 이루어진 한자다. 진주성 전투와 논개의 충절을 예견하고 지은 게 아닐 텐데,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필연 같다. 지난달 30일 촉석루에서 느낀 소회다.
밀양 영남루, 평양 부벽루와 함께 조선의 3대 누각으로 꼽혔던 촉석루가 최근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고 있다. 이유는 ‘국가지정문화재’로의 승격 때문이다. 영남루가 최근 국보로 지정·예고된 게 계기가 됐다. 앞서 2008년 화재로 소실된 숭례문은 2013년 재건되면서 국보의 위치를 그대로 간직했는데, 그때도 촉석루에 대한 국가지정문화재로의 승격 주장이 있었다. 그게 10년 만에 다시 촉발된 것이다.
촉석루는 1241년(고려 고종 28년) 창건된 유서 깊은 누각으로, 남강을 끼고 축성된 진주성 내에 있다. 800년 가까운 기간 동안 여러 차례 중건과 보수가 있었지만, 특유의 고고한 자태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 문제는 촉석루가 6·25 전쟁으로 불탄 이후, 평가절하됐다는 점이다. 1948년 국보(276호)로 지정됐으나, 전쟁으로 누각이 불타면서 다시 지어졌다. 재건되기 전인 1956년 국보에서 해제된다. 지금의 건물은 1960년에 진주고적보존회가 국비와 시민의 성금 등으로 복원한 것이다. 재건 이후 촉석루는 줄곧 문화재 가운데 가장 하위 등급인 경남도 문화재자료에 머물러 있다가, 2020년에야 겨우 경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돼 지금에 이르고 있다.
지역 사학계는 이번에야말로 촉석루의 문화재 승격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지역 향토 사학계를 주축으로 서명운동에 들어갔다. 경남도의회 차원에서도 국가지정문화재 환원 촉구 대정부 건의안이 이달 중 발의될 예정이다. 하지만 국가지정문화재로의 승격 문제는 결코 쉬운 게 아니다. 가장 큰 걸림돌은 1960년 재건 때 이루어진 ‘원형’ 훼손이다. 불타기 전의 모습은 충실히 반영돼 있지만, 재건 과정에서 누각 1층의 목재 기둥(30개)이 석재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접근을 달리하면 ‘희망’은 있다. 그 가능성은 촉석루의 가치를 제대로 되찾는 것이다. 단순히 건물이 오래됐다고 보물이 되고 국보가 되는 소위 ‘골동품적 사고’에서 벗어나 촉석루의 본질적 가치에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진주대첩과 논개, 김시민 장군 등으로 대변되는 촉석루의 역사성과 상징성은 다른 누각과 차별화되는 촉석루만의 가치다.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의 큰 흐름도 유적이나 유물의 가치에 주목하고 있다. 지역 학계와 전문가, 행정은 촉석루에 대한 조사 작업은 물론이고, 학술대회나 심포지엄 등을 통해 촉석루가 가진 가치를 널리 알려야 할 의무가 있다. 10여 년 전 〈진주성 촉석루의 숨은 내력〉이란 책을 펴낸 바 있는 하강진 동서대 미디어콘텐츠대학 교수는 “불굴의 민족사와 충의 정신이 생생히 살아있는 촉석루는 누각의 물리적 실체보다 그곳에 켜켜이 쌓인 오랜 역사의 숨결이 더 값지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촉석루의 역사성과 상징성은 화재로도 소멸하지 않는 불변의 가치란 얘기다. 이처럼 전문가들이 나서서 촉석루에 내재한 가치를 발굴하고 끌어내야 한다. 이게 전제됐을 때 “숭례문과 비교해 촉석루가 지나치게 홀대받는다. 이는 지방 홀대이자 문화의 지역 홀대다”라는 지역 향토 사학자들의 주장도 더 이상 외면받지 않을 것이다. 나아가 “1397년 건축된 일본 교토의 금각사(긴가쿠지)는 1950년 7월 화재로 소실되었지만 여러 차례 복원 끝에 199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는 등 일본인들이 자랑하는 문화유적이 됐다. 금각이 너무 금빛 찬란해 ‘원형 복원’이라고 하기에는 거리가 있었지만 금각사는 현재 귀한 대접을 받고 있는데, 국보였던 촉석루는 상대적으로 너무 푸대접받는 것 아니냐”고 외국의 사례를 들어 얘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라도 진주시와 경남도는 장기 계획을 세워 촉석루의 문화재 승격을 향해 차근차근 나아가야 한다. 일본 금각사가 불탄 이후 이를 재건하기 위해 일본 사회가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살펴보면 그 역할이 보일 것이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 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임진왜란 때 촉석루에서 왜장을 안고 남강에 뛰어든 논개의 절개를 노래한 변영로의 ‘논개’라는 시의 일부다.
대한민국, 그 자부심의 한가운데 촉석루가 있다.
정달식 논설위원 dosol@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