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은 왜 공을 피해만 왔나 [골 때리는 기자]

박혜랑 기자 rang@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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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여자축구 첼시에서 뛰고 있는 지소연이 2021년 10월 영국 런던의 킹스메도우에서 열린 유럽축구연맹 여자 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 A조 1차전 홈 경기에서 상대 수비수들과 공을 다투고 있다. 부산일보DB 잉글랜드 여자축구 첼시에서 뛰고 있는 지소연이 2021년 10월 영국 런던의 킹스메도우에서 열린 유럽축구연맹 여자 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 A조 1차전 홈 경기에서 상대 수비수들과 공을 다투고 있다. 부산일보DB

여자축구 관련 서적 중 가장 유명한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축구'의 추천사에는 이런 문장이 등장한다. '여자에겐 언제나 운동장의 9분의 1쯤만이 허락돼 왔다'. 그 누구도 여학생에게 운동장을 쓰지 말라고 하진 않았지만, 학창 시절을 돌이켜보면 누구나 공감할만한 문장이다. 체육 시간에 여유가 생기면 여자는 피구, 남자는 축구를 해온 경험이 있을 것이다. 여자는 공을 '피하고', 남자는 공을 '차기만' 했던 탓일까. 쉬는 시간만 되면 공을 가지고 운동장으로 뛰어나가는 남자아이들과 왜 공을 같이 차 볼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처음 축구를 시작하면서 가장 무서웠던 건 '몸싸움'이었다. 공을 차본 지 얼마 되지 않은 여성들에게 누군가를 몸으로 밀치거나 밀쳐지는 행동은 당황스럽다. 실력이 좋은 여성들이 모여있는 팀과 경기를 한 적이 있다. 공을 몰고 골대로 전진하고 있는데, 수비수가 달라붙었다. 당황해서 흘려버린 공을 수비수가 몸을 밀치면서 깔끔하게 처리했다. 같은 팀원으로부터 휴식 때 '왜 몸싸움을 하지 않느냐'는 핀잔을 들었다. 소극적인 플레이는 경험에서 비롯됐다. 상대방이 어깨로 밀면서 공을 지키는데 어딘가 모르게 기분이 나빴다. 개인적으로 서운한 일이 있는지 혼자서 생각하기도 했다. 실제로 함께 공을 차던 다른 여성회원도 같은 고민을 털어놓으며, '몸싸움이 부담스럽다'며 축구를 그만두기도 했다.

하지만 몸싸움을 공놀이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된 계기가 있다. 바로 몸싸움 후 상대방의 태도에서다. 그날도 공 한번 터치하기 못한 채 밀쳐진 후였다. 상대팀 한 명이 다가와 '좋은 경기였다'는 이야기를 건넸다. '다치지 않았냐'는 따뜻한 질문도 들었다. 개인적인 감정 따위는 애초에 없었다. 감독님은 "몸싸움도 '잘'해야 한다. 몸싸움의 핵심은 공을 뺏기 위한 것이지 사람을 밀기 위한 것이 아니다"라며 모든 축구의 룰에 이 기본원칙이 전제돼 있다고 설명했다. 경기 심판들도 몸싸움의 핵심만 잘 지킨다면 쉽게 휘슬을 불지 않는다.

과도하게 상대방의 진로를 방해하며 밀치지만 않는다면, 몸싸움은 정당한 공놀이의 일부일 뿐 아니라 축구를 더 재밌게 즐길 수 있는 요소다. '축구는 11 대 11로 하는 경기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상대방을 속이고 밀면서 한 명을 '지워'버려야 골을 넣을 수 있다. 이때 핵심이 되는 것 중 하나가 몸싸움이다. 몸싸움의 묘미를 깨우친 후, 한 명을 제친 채 골망을 흔드는 쾌감을 경험했다.

이후 축구를 할 때뿐 아니라, 축구를 볼 때도 피치 밖 선수들을 행동을 눈여겨봤다. 아무리 격하게 싸웠더라고 꼭 악수를 하고, 유니폼을 교환하고, 졌더라도 웃으면서 손을 건넸다.

으레 '여자축구는 재미없다'는 편견이 여성들 스스로를 갇히게 만든 게 아닐까. 사실 '여자들은 몸싸움을 꺼려한다'는 말을 옛말이 되어버렸을 수도 있다. 이미 몸싸움의 묘미를 알고 공놀이를 즐기는 여성들이 많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직 격한 몸싸움의 매력을 잘 모르는 여성들은 피치 밟기를 머뭇거리고 있다. 격하게 싸운 뒤 웃으며 서로를 존중하고 격려하는, 그 맛을 딱 한 번이라도 맛보길 바란다.


박혜랑 기자 rang@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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