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MoCA, 오늘 만나는 미술] 이름 없는 자를 새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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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상희 ‘검은 비’

여상희 '검은 비'. 부산현대미술관 제공 여상희 '검은 비'. 부산현대미술관 제공

작가 여상희의 ‘검은 비’(2024)는 한국 근현대사의 희생자 이야기를 담은 비석들이다. 이 비석들은 업적을 남기려는 거대한 기념비가 아닌 이름 없는 희생자들을 위해 검은 추모비를 세운 것이다.

여상희는 사회상이 기록된 신문지를 구기고 물에 풀어 수많은 활자와 사진을 해체하고 이를 다시 가압하여 단단한 비석 형태로 만들었다. 그 위에 바니시를 바르고 인두로 지져 역사를 담았다. 연약한 종이의 질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비석에 새겨진 내용은 다양하다. 한국전쟁기 많은 피난민이 부산으로 몰리면서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일본인들의 공동묘지 위에 터를 잡고 비석과 묘비로 집을 짓고 살았던 아미동 비석마을 구술록을 새겨 넣었다.

그뿐만 아니라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많은 형무소의 재소자들의 희생도 있었다. 대전형무소에 있던 재소자들과 제주 4.3에서 잡혀 온 사람들, 보도 연맹원들, 어린아이와 여성들을 포함한 민간인들이 산내 골령골로 끌려가 학살을 당했고 유해가 근래에 와서 발굴되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조직되면서 묻힌 이야기들을 조사하고 증언하고 있으나 여전히 신원이 확인된 유해는 많지 않다. 이 위원회는 항일 독립운동과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 권위주의 통치로 인한 인권침해로 인한 희생 사건을 조사하는 기관으로 작가는 유해 발굴 봉사에 참여했다. 여상희 작가가 대전 산내 골령골 유해 발굴에 참여했을 당시, 추려진 뼈를 아세톤으로 세척해 보아도 총탄의 흔적은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경험이 작품에 이르러 과거의 폭력과 진실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 내는 것이다. 작가가 만든 종이 죽 비석은 제주 4.3 희생자들과 광주 5.18 희생자들, 그리고 위안부 희생자들, 그 밖에도 군인으로 참여한 유엔군 무명의 용사비도 포함되었다.

한편 ‘검은 비’ 작품에는 대전시립미술관의 소장품 ‘검은 대지’가 함께 포함되어 전시되어 역사와 지리적 경계를 넘나드는 포용성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그들의 피가 뿌려진 대지 위에 우리가 서 있다.

이 작품은 부산현대미술관 전시 ‘이것은 부산이 아니다: 전술적 실천’에서 7월 7일까지 직접 감상할 수 있다.

김소슬 부산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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