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사진 긁힌 독립운동가…행정 무관심 속 훼손 방치
최천택 선생 묘비 주변 안내판 손상
조선시대 병사 조형물 창끝도 파손
“발길 적은 공간도 세심히 관리해야”
부산 동구를 대표하는 독립운동가 묘비의 안내판 얼굴 사진이 훼손된 채 방치되고 있다. 주변에 설치한 조선시대 병사 조형물도 부러진 창을 들고 있어 쓴웃음을 자아내는 등 부산의 역사와 정신을 숭상하기 위해 설치한 상징물에 대한 관리 부실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25일 오전 10시께 동구 좌천동 좌천체육공원 옆. 증산공원으로 이어지는 경사형 엘리베이터 상부 인근에 묘비가 하나 놓여 있다. 2021년 2월 옥성사에서 묘비 자리가 옮겨진 독립운동가 최천택(1897~1962) 선생의 정신을 기리기 위한 곳으로 옆쪽 담벼락에 생애와 업적을 설명한 안내판 2개도 붙어 있다.
오른쪽 안내판에 담긴 최 선생 사진은 얼굴 부분이 여기저기 훼손된 상태였다. 좌우와 위아래로 긁히거나 갈라진 자국이 뚜렷했다. 두 안내판 모두 녹이 슨 듯 곳곳이 짙은 갈색으로 변색됐다.
최 선생 묘비 주변에는 조선시대 병사 조형물도 나란히 서 있었다. 그런데 바다 방향으로 놓인 한 병사는 오른손에 든 당파(삼지창) 끝부분이 부러져 있었다. 지난달 손목이 파손됐다는 민원이 들어온 후 팔 부분은 다시 붙였지만, 뾰족했던 창끝은 여전히 무딘 모습이었다.
최 선생 묘비뿐 아니라 조선시대 병사가 놓인 공간은 역사적 의미가 크다. 좌천동이 고향인 최 선생은 동구를 대표하는 독립투사다. 부산공립상업학교(개성고) 2학년 때 우리 민족 얼이 담긴 국사책 ‘동국사기’를 인쇄해 학우들에게 나눠주다 일본 경찰에 구금됐다. 1920년 고교 친구인 박재혁 의사가 부산경찰서를 폭파한 일을 도왔고, 2003년 건국훈장 애족장도 받았다.
조선시대 병사 조형물은 옛 부산진성 자리에 있는 증산공원 주변에 서 있다. 임진왜란 초기 일본군과 맞서 싸운 성이 있던 공간이다. 성곽 뒤에 세워둔 병사도 그 역사적 의미를 반영한 조형물이다. 동구청은 2015년 산복도로 르네상스 사업의 일환으로 개당 480만 원을 들여 병사 조형물을 설치했다.
이곳은 독립운동가 기림벽이나 윤흥신 동상처럼 시민들이 많이 찾는 곳은 아니다. 하지만 부산의 호국 역사와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금을 들여 조성한 곳인 만큼 보다 꼼꼼한 관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묘비 주변에 있던 30대 시민 A 씨는 “여기처럼 접근성이 떨어지는 곳은 관광객이 일부러 노력을 들여 찾을 텐데 관리가 안 된 모습을 보면 실망감이 클 것”이라며 “부산의 역사성과 이미지를 되새기기 위한 공간인 만큼 작은 곳도 꼼꼼하게 살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관할 동구청은 현장을 확인해 보수에 나서겠다는 입장이다. 동구청 관계자는 “묘비 옆 새로운 안내판과 달리 담벼락에 붙은 안내판 2개는 2015년 산복도로 르네상스 사업 당시 설치한 것으로 파악된다”며 “조만간 수리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조선시대 병사 팔 부분은 수리를 마쳤는데 나머지는 현장 확인 후 추가 보수나 철거를 결정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우영 기자 verdad@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