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가 된 과학자 이휘소, 핵개발 의혹 사망설은 소설”
대한민국 과학자의 탄생 / 김근배·이은경·선유정
한국 초창기 자연과학자 30명
영화 같은 삶과 자취 추적기
전쟁·이념에 희생 많아 아쉬움
<대한민국 과학자의 탄생>이란 제목이 인상적이다. 그동안 한국에 과학자가 없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바로 이름이 떠오르는 과학자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한국에도 감동을 주는 탁월한 과학자들이 있었다. 어려운 시대 상황에서도 미지의 과학 세계에 도전하고 그 길을 개척한 과학자들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한국이 있다. 전북대 김근배 교수를 비롯한 연구자들이 15년간의 연구를 통해 역사 속에 묻혀 있던 근현대 과학인들의 삶을 발굴해 냈다. 초창기 자연과학자 30명의 이야기, 어쩌면 그렇게도 영화 같은지 모르겠다.
이 책은 출생순에 따라 한국인 최초의 화학자 리용규부터 시작한다. 그는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노동 이민을 떠난 뒤 미국 본토로 건너가 주경야독의 만학 끝에 조선인 최초로 화학 전공 석사 학위를 받는다. 서당만 다닌 사람이 미국에서 석사 학위를 받으려면 대체 공부를 얼마나 했을까 싶다. 조선으로 돌아와 숭실전문 교수로 일하다 북한으로 올라간 뒤 행적은 알려진 바가 없다고 한다.
김량하는 일제강점기 일본 최고의 연구기관인 이화학연구소에서 쌀 배아 성분과 비타민E 연구를 했다. 특히 비타민E 연구법을 가장 먼저 개발해 한국인으로서는 노벨상 후보로 처음 거론되기도 했다. 일본 유학 시절 그의 신혼집은 마치 조선인 학생 구락부 혹은 만남의 광장 같았다니 성격도 활달했던 모양이다. 1945년에는 부산수산전문학교(부경대 전신) 교장으로 임명됐다. 그는 일제로부터 학교를 접수하고, 학교의 주요 자산이었던 실습용 배를 되찾았다. 학교를 위해 활발한 계획을 세웠지만 이듬해에 억울하게도 파면되고 만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남쪽으로 피난했지만 일이 있어 잠깐 서울로 올라갔다가 납북된 것으로 추정된다.
해방 직후 남대문 시장 쓰레기 더미에서 <미국수학회보>를 발견하고, 거기 실린 미해결 문제를 풀어서 보내 그곳 논문에 게재된 영화보다 영화 같은 이야기의 주인공이 있다. 대수학 분야에서 중요한 업적을 남긴 천재 수학자 리림학이다. 그의 논문은 해방 후 한국 연구자가 국내에서 연구한 성과를 영어권 해외 학술지에 발표한 첫 사례였다. 그는 1953년 부산에서 화물선을 타고 캐나다로 건너가 2년 만에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부인은 “남편의 삶은 수학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오랫동안 한국 정부와 불편한 관계였다. 어쩌면 그래서 우리가 그의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싶다.
우리나라 나비 이름의 3분의 2 이상은 ‘나비 박사’ 석주명이 지은 것이다. 그는 평생에 걸쳐 75만 개체에 이르는 나비 표본을 수집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도 피난을 가지 못하고 서울에 머물렀다. 하긴 목숨보다 귀한 그 많은 나비 표본을 두고 어디로 간다는 말인가. 불에 탄 과학박물관 재건회의에 가는 길에 공산당으로 오인돼 총을 맞아 사망했다니, 이 얼마나 억울하고 안타까운 죽음인가.
이휘소는 한국이 자랑하는 가장 저명한 이론물리학자다. 당대 물리학에서 가장 앞서갔던 그의 연구는 스티븐 와인버그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이 노벨상을 수상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래서 이휘소를 ‘노벨상 메이커’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불과 41세 때 대형 트럭과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 뒤 한국의 원자폭탄 개발 비밀 프로젝트에 연루되었다는 허구를 담은 소설이 인기를 얻으며 이휘소는 잘못 신화화되고 말았다. 연구자들은 핵폭탄을 제조하기 위해 그의 연구가 꼭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고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책을 덮고 나니 우리가 한국의 과학자들을 잘 모르는 이유가 이해된다. 많은 과학자가 월북하거나 납북되었다. 한국전쟁과 이념 갈등은 여러 과학자의 목숨을 앗아갔고, 독재 정권의 통치는 해외에 체류하던 과학자들의 발을 붙들었다. 그나마 남은 과학자들조차 이념으로 재단되어 배제되고 지워졌다. 이제 기억해야 할 이름들을 마음에 새긴다. 그 어려운 시절에도 그렇게 열심히 과학을 했는데, 지금 우리는 뭘 하고 있나 싶기도 하다. 김근배·이은경·선유정 지음/세로북스/752쪽/4만 9000원.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