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핵개인의 시대, 가족의 의미는
치솟는 물가에 5월은 ‘가난의 달’ 푸념
결혼·출산 줄면서 출생률 끝 모를 추락
1인 가구 40% 넘어 ‘나혼산’이 대세로
비혼·동거·동성 결혼 등 다양성 포용을
시대의 흐름에 뒤처지면 안 된다는 직업적 강박 때문일까. 먼지 쌓인 책장을 정리하다 보니 제목에 ‘시대’가 들어가는 책이 유난히 많다. 〈과부하시대〉 〈가녀장의 시대〉 〈시대예보: 핵개인의 시대〉 〈고립의 시대〉 등등. 물론 ‘과부하시대’를 사는 현대인답게 모든 책은 한두 챕터씩 띄엄띄엄 읽다 말다 한다. 완독의 길은 점점 더 멀고도 험해진다. 오롯이 한두 시간 정도의 집중력을 유지할 수 있는 곳은 이제 공연장과 영화관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업무 관련 ‘카톡’이 끊임없이 울리고, 중독성 강한 콘텐츠가 무한정 제공되는 스마트폰을 강제로나마 끌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렇잖아도 정신 없는 와중에 각종 기념일이 몰려 있어 직장인들의 허리가 휜다는 5월이 왔다. 치솟는 물가 탓에 5월은 ‘가정의 달’이 아니라 ‘가난의 달’이라는 푸념 섞인 이야기마저 나온다. 가정을 꾸리거나 아이를 낳는 일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세태 속에 출생률은 해마다 최저 기록을 다시 쓴다.
그럼에도 가족의 의미를 되새겨 보라는 가정의 달을 맞아 소설 〈가녀장의 시대〉를 다시 펼쳐본다. 주인공 30대 여성은 ‘모부’(작가는 익숙한 한자어의 순서마저도 부모가 아니라 모부로 뒤집어 놓았다)를 직원으로 고용한 출판사 대표이자 그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녀장’이다. 작가 이슬아는 ‘아비 부’의 자리에 ‘계집 녀’를 적자 흥미로운 질서들이 생겨났다고 썼다. 가부장을 뛰어넘은 새로운 가녀장 체제에서 돌봄과 살림을 공짜로 제공하던 엄마들의 시대는 막을 내린다. 주인공은 1년간 먹을 주요 식재료인 된장을 담그기 위해 외가로 세 번의 ‘출장’을 떠나는 엄마에게 출장 수당을 지급한다. 가부장이었던 할아버지처럼 엄마의 가사 노동을 공짜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그가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집밥의 가치를 충분히 인정해 보너스를 입금한다.
월급도 엄마가 아빠보다 배로 받는다. “엄마의 노동이 아빠의 노동보다 대체 불가하기 때문”이라는 가녀장의 말에도 아빠는 불만이 없다. 하이브 소속 레이블 어도어의 민희진 대표가 외친 ‘개저씨’라는 혐오 표현이 최근 화제가 되는 것과 대조적으로, 그의 아버지는 ‘아름다운 아저씨’로 그려진다. 딸이 가족 서열의 정점에 있기에 모부의 방은 지하에 있다. 영화 ‘기생충’을 연상시키는 기묘한 그림이다. 드라마로도 제작된다는 이 유쾌한 소설이 어떤 반응을 얻을지 궁금해진다.
가부장제도 아이 울음 소리도 희미해져 가는 가운데 1인 가구는 급증했다. 행정안전부 인구통계에 따르면 지난달 기준 전국 1인 가구는 1003만 9114세대로, 전체의 41.8%에 달한다. 열 가구 중 네 가구 이상이 나 혼자 사는 셈이다. 부산의 경우 20대 여성의 1인 가구 증가율이 특히 높다. 2019년 3만 7469명이던 20대 여성 1인 가구는 2022년 4만 8996명으로, 3년 사이 30% 이상 늘었다. 젊은 세대의 결혼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는 점이 주요 원인(부산일보 3월 8일 자 8면 보도)으로 꼽힌다.
이처럼 ‘핵가구의 시대’를 넘어 ‘핵개인의 시대’가 왔는데도 비혼이나 동거, 동성 결혼, 비혈연 가구 등 다양한 삶의 방식에 대한 불편한 시선이나 편견은 여전하다. 〈시대예보: 핵개인의 시대〉에서 저자 송길영은 “오랫동안 우리들의 머릿속을 지배해 온 것이 지금은 불편한 단어로 인식하는 ‘정상 가정’이라는 환상”이라고 꼬집었다. 이 모습에서 벗어난 형태를 ‘결손 가정’이라는 폭력적인 표현으로 부르던 때가 있었던 것도 지적한다. 그는 프랑스의 혼외 출생자 비율이 전체의 60%가 넘는다는 점을 들어 “정책이 출생률을 높이기 위해 결혼을 장려하는 방향으로만 일원화한다면 결과는 나아지기 어렵다”며 확장된 가족의 의미를 제시하기도 했다.
국내 동성 부부 최초로 지난해 아기를 출산해 화제가 된 김규진·김세연 씨. 이들은 얼마 전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가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혈연이 중요하지 않다”며 “서로 사랑하고, 내가 가족이라고 생각하면 가족”이라고 답했다. 이들은 임신을 위해 국내에서 정자 제공을 받는 것도 고려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법적 부부나 사실혼 이성애 부부에게만 정자를 제공해 포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단순히 결혼과 출산을 하고 가정을 이룬다고 해서 더 이상 외롭지 않다거나 행복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영국의 경제학자 노리나 허츠는 저서 〈고립의 시대〉에서 “휴대전화에 빠진 파트너 때문에 결혼 생활 상담사들에게 외로움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었다”며 스마트폰과 소셜 미디어가 의사소통하는 능력을 갉아먹는 세태를 짚기도 했다. 현재 당신이 생각하는 가족은 과연 어떤 모습인가. 다양해진 가족의 형태와 핵개인의 삶을 포용할 수 있는 사회적 제도와 정책을 고민해 봐야 할 때다.
이자영 사회부 차장 2young@busan.com
이자영 기자 2young@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