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어지는 고금리에 기업도 예금 깨서 빚부터 갚는다
10억 원 초과 예금 1년째 감소
한은 통계 집계 이후 사상 처음
부동산·도소매업 등 대출 많아
"금리인하 없으면 추세 지속돼"
기업들이 고금리 장기화를 버티지 못하고 정기예금을 해지해 빚부터 갚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물가 등으로 기준금리 인하 시점 전망이 점차 뒤로 밀리고 있는 만큼 당분간 이 같은 현상은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
7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은행의 저축성예금(정기예금·정기적금·기업자유예금·저축예금) 중 잔액이 10억 원을 초과한 계좌의 총예금은 771조 7490억 원이었다. 지난 2022년 말(796조 3480억 원)보다 24조 5990억 원(3.1%) 감소했다. 지난해 상반기 중 23조 9210억 원 감소한 데 이어 하반기 중에도 6780억 원이 더 줄었다.
10억 원 초과 고액 예금 잔액은 2018년 상반기 500조 원, 2019년 하반기 600조 원, 2021년 상반기 700조 원을 차례로 돌파하며 증가세를 이어왔으나 800조 원을 목전에 두고 후퇴했다. 이 잔액이 두 반기 연속으로 줄어든 것은 한은이 지난 2002년 상반기부터 관련 통계를 작성한 이래 처음이다.
세부적으로는 정기예금 잔액 감소가 전체 감소를 이끈 것으로 분석된다. 지난해 말 기준 10억 원 초과 정기예금 잔액은 531조 8180억 원으로 2022년 말(564조 5460억 원)보다 32조 7280억 원(5.8%) 줄었다. 지난해 상반기 중 25조 7300억 원 줄어 반기 기준 역대 최대 감소 폭을 기록한 데 이어 이어 하반기 중에도 6조 9980억 원이 추가로 줄었다.
반대로 10억 원 초과 기업자유예금 잔액은 2022년 말 219조 8900억 원에서 지난해 상반기 말 222조 5850억 원, 하반기 말 229조 6100억 원 등으로 점차 늘었다. 기업자유예금은 법인이 일시 여유 자금을 은행에 예치하는 상품이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고금리 상황에서 정기예금을 해지해 대출 상환 등에 사용하는 기업들이 적지 않다”며 “나머지 돈은 입출금 예금에 넣어 운영자금 등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 지난해 말 기준 기업의 원화 예금 잔액은 637조 5020억 원으로 1년 전보다 5조 8260억 원(0.9%) 줄어 19년 만의 감소세를 나타내기도 했다. 같은 기간 가계 예금 잔액이 853억 8140억 원에서 925조 9810억 원으로 8.5% 증가한 것과 대조됐다.
한은 관계자는 10억 원 초과 예금 잔액 변화에 대해 “지난해 상반기의 경향이 하반기까지 이어지지 않았나 추정한다”고 말했다.
한편 국내 금융기관의 기업 대출은 지난해 말 기준 약 1900조 원까지 불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금융연구원이 발간한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금융기관 기업 대출 잔액은 지난해 말 1889조 6000억 원(은행권 1350조 5000억 원, 비은행권 539조 1000억 원)으로, 팬데믹 기간(2019년 말~2023년 말) 분기 평균(전년 동기 대비 기준) 10.8%씩 불어났다.
기업 규모별로 보면 대기업과 중소기업 대출이 각각 54.3%(98조 9000억 원), 56.5%(564조 원) 증가했다. 산업별로는 팬데믹 이후 생산성이 낮은 부문으로 인식되는 부동산 관련 업종과 팬데믹 피해가 집중된 서비스 업종을 중심으로 기업 대출이 늘었다. 특히 부동산 관련 업종의 비은행권 대출이 팬데믹 이후 거의 2배 규모로 확대되면서 비은행권 대출 의존도가 급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도소매업과 숙박음식업 대출도 정부 지원의 영향으로 크게 늘어났다.
김진호 기자 rplkim@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