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무당적 국회의장
권위주의 시절에는 대통령이 국회의장을 지명하기도 했다. 임명된 국회의장은 직권상정, 날치기 통과 등을 통해 청와대에 충성을 표시해야만 했다. 청와대 지시에 따라 의장이 날치기 처리에 나서거나 여당 단독으로 의안을 처리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오죽했으면 국회를 법률 제정 기관이 아니라 법을 통과시켜 주는 ‘통법부’ ‘거수기’로 부르기도 했다. 그만큼 국회의 존재감을 낮잡아 봤다.
이에 반기를 든 국회의장이 이만섭 전 의장이다. 그는 16대 전반기 국회의장 취임 일성으로 “저는 앞으로 이 자리에서 의사봉을 칠 때, 한 번은 여당을 보고, 한 번은 야당을 보며, 또 마지막으로는 국민을 바라보며 ‘양심의 의사봉’을 칠 것입니다”라고 밝혔다. 이 전 의장은 국회의장은 여당과 야당 중 어느 한 정당에 일방적으로 치우치지 않는 결정을 내리고, 여당과 야당의 이해관계보다는 국민의 이익이 무엇인지 판단하여 자신의 결정에 반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4대 잔여 임기 국회의장을 맡았다가 청와대의 예산안 날치기 처리 요구를 거부하는 바람에 중도 낙마했던 이 전 의장은 “날치기만은 안 하는 의장이 되겠다”라고 선언했다.
이 전 의장은 재임 시절인 2002년 국회법 20조 2항(국회의장 당적 보유 금지)을 통과시켰고, 헌정사상 처음으로 무당적 국회의장이 됐다. 국회법에서 ‘무소속 국회의장’을 정한 것은 그만큼 다수당에 휘둘리지 않고, 국회를 공정하게 운영하고, 중재자적 역할을 제대로 맡으라는 취지다. 하지만, 최근 더불어민주당의 국회의장 후보들이 “민주당에 유리하게 국회의장직을 수행해야 한다” “국회의장은 중립이 아니다” “다음 선거 승리를 위해 토대를 깔아줘야 한다” “긴급 현안은 의장 직권으로 본회의를 열어 처리하겠다” “기계적으로 중립만 지켜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는 발언들을 마구잡이로 쏟아내고 있다고 한다.
헌법 제46조 2항에 “국회의원은 국가 이익을 우선하여 양심에 따라 직무를 행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민주당 국회의장 후보들의 중립성 포기 발언의 목적이 국가 이익인지, 민주당 이익인지, 자신의 정치적 생존인지 궁금할 따름이다. 이 전 의장은 회고록 〈날치기는 없다〉에서 “시간이 흐르면 국회의장이 국회를 굳건히 지키는 게 오히려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이해할 겁니다. 국회는 여당의 국회도, 야당 국회도 아닙니다. 오직 국민의 국회입니다”라고 설파했다. 민주당 국회의장 후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