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29회 바다의 날, 기억해야 할 그들의 서사
김종해 국립해양박물관 관장
오는 31일은 제29회 바다의 날이다. 해양산업의 중요성과 의의를 알리고 국민의 해양사상을 고취하며, 관계 종사원의 노고를 위로할 목적으로 제정한 법정기념일이다. 해양산업을 구성하고 지탱해 온 ‘해양인’을 잊지 않고 이들에게 긍지와 자부심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는 뜻깊은 날이기도 하다. 5월 31일로 정해진 것은 통일신라시대 장보고 대사가 청해진을 설치한 날을 기념하는 것도 있지만, 국민 축제가 열리기 적합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해양수산 분야 종사자는 고령화와 더불어 기후변화, 어촌 공동체 약화 등으로 삶의 형태가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이들의 생생한 경험과 생활상을 보존하고자 국립해양박물관은 해양수산부의 적극적 지원으로 〈바다 사람들의 생애사〉라는 4권의 학술총서를 발간했다. 바다를 터전으로 삶을 영위해 온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아카이빙한 것이다. 단순히 그들의 일뿐만 아니라 일에 대한 자부심, 바다에 대한 애정 등을 엿볼 수 있다.
2018년부터 2021년까지 4년간 만난 60명의 ‘바다 사람’들의 직업은 그 수만큼이나 다양했다. 흔히들 알고 있는 조선소 노동자, 등대원, 항해사, 어부를 비롯해 조선소 인근 식당 주인, 거문도 뱃노래꾼, 초분(草墳·뱃사람들의 임시 무덤) 기술자, 가자미식해 명인까지 바다가 없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직업인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채록했다.
선장이자 ‘물범 지킴이’인 김진수 씨는 ‘범 영감’이라 불린다. 호기심 많고 사랑스러운 눈망울의 물범과 공생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찾고 실천하는 분이다. 조업한 노래미며 우럭을 물범과 나누기도 한다. 전남 완도군의 등대섬에서 태어나 평생 등대원으로 근무한 강용정 씨도 기억에 남는다. 무명옷만 입던 아버지가 육지로 나가기 위해 방직공장에서 만든 새하얀 ‘난닝구’를 입은 모습이 눈부셨다고 했다. 돌이켜 보면 이들의 이야기는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해 힘써 온 우리네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험난한 여정을 겪은 사례도 있다. 원양어선 선장인 정효모 씨는 그린란드 해역에서 퍼펙트 스톰을 만나 기적처럼 빠져나왔다. 그린란드는 북아메리카 북동부 대서양과 북극해 사이에 있는 세계 최대의 섬이다. 전 국토의 약 85%가 빙상으로 덮인 탓에 빙하에서 뿜어 나오는 차가운 공기로 항상 서늘하다. 이곳 해역에서 구사일생한 정 씨는 입항하자마자 현지 성당으로 달려가 제단에 엎드려 펑펑 울었다고 한다.
이처럼 역사책의 한 페이지를 기록할 만한 뜻깊은 이야기도 있고, 신화처럼 느껴지는 놀라운 이야기도 있다. 바다를 배경으로 살아온 그들의 삶은 개인의 역사를 넘어 살아 숨 쉬는 박물관이었다. 찾아가 듣지 않았다면 기록되지 않았을 역사이기도 하다. 그래서 흔히들 바다의 역사를 실제로 있었으되 기록은 없는 유사무서(有史無書)의 역사라고 한다. 육지의 역사에 비해 변방으로 여겨졌으며, 미처 문자로 기록하기에는 바다의 생업이 숨 가빴던 탓이다. 지금은 빠른 속도로 사라져 가고 있는 이들의 경험과 지식을 해양수산부와 국립해양박물관이 아카이빙한 이유다.
역사 속 위대했던 해양인물의 궤적을 통해 긍지를 높이는 것도 좋지만, 일상 속 마주하는 ‘바다 영웅’들도 사회적으로 호명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소금이 오는 것을 보며 땀을 닦는 염부, 비공식 외교관인 외항선 선원 등 바다에 평생을 바쳐온 사람들의 경험을 기록해 전함으로써 후세가 더욱 풍성한 해양문화를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지금 우리의 역할이라 믿는다.
‘노인 한 명이 죽는 것은 도서관 하나가 불타는 것과 같다’는 유명한 문장은 아프리카 말리 출신의 소설가 아마두 함파테 바가 남긴 말이다. 이는 인류의 지혜와 문화의 힘에 대한 비유이자, 문화 전승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대목이다. 해양문화 유산의 보존과 관련된 직업인으로서 이 문장을 이렇게 바꾸어 보고자 한다.
‘어부 한 명이 죽는 것은 바다 하나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