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수체의 안상수, ‘ㅎ’으로 전하는 직관
내달 9일까지 개인전 ‘홀려라’
부산 OKNP, 상업화랑 첫 전시
압도적 조형미 ‘문자도’ 눈길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유명한 속담이다. 큰 업적을 이룬 인간에 대한 공식적인 인정은 시대를 뛰어넘어 그 사람의 이름이 기억된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안상수’는 대한민국의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이름이자, 또한 앞으로도 기억에 남을 이름이다. 컴퓨터로 한글 문서를 작성해 본 적이 있다면 한 번쯤 봤던, 서체 안상수체의 창시자이다.
1985년 발표된 안상수체는 디자인 분야(타이포그래피)에선 획기적인 ‘발명’으로 여겨진다. 한자의 네모 틀을 벗어난 파격적인 디자인에 훈민정음 해례본의 제자 원리가 그대로 들어갔다는 점에서 높은 가치를 인정받았다.
한국에선 안그라픽스 대표, 디자인계 거장, 홍익대 교수로 유명한 안상수는 사실 오래 전부터 자신의 작품 세계를 오롯이 가진 작가였다. 2000년대 초반부터 대형 미술관을 비롯해 국내외 비엔날레, 트리엔날레 초대를 받아 작품을 선보였고, 2017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날개파티’ 전시는 서울시립미술관 최초로 대만에 전시를 그대로 수출했다. 물론 대만에서 강력히 원해서 전시를 가져갔다.
이력의 정점을 찍을 무렵, 안상수는 놀라운 선택을 한다. 홍대 교수를 그만두고 디자인 대안학교 ‘타이포그라피배곳(‘배곳’은 ‘배우는 곳’이라는 뜻의 순 우리말)’을 열었다. 작가로서는 한글 문자를 바탕으로 감각과 지각을 일깨우는 문자도(圖) ‘홀려라’ 시리즈를 시작한다.
부산 OKNP에서 6월 9일까지 열리는 안상수 개인전 ‘홀려라’는 상업화랑에선 처음 열리는 안상수 전시이다. 수많은 갤러리에서 러브콜을 보냈지만, 작가는 부산 OKNP를 선택했다. 작품 세계에 대한 이해와 열정에 마음이 움직였다고 한다. 그야말로 지역의 갤러리가 세계적인 거장을 잡은 셈이다.
“선생님말고 그냥 날개라고 불러요!”. “선생님은…”으로 인터뷰를 시작하자 제지당했다. 디자인대안학교를 열며 그는 선생님이라는 호칭 대신 스스로 날개라는 별명으로 부르라고 한다. 유명한 이름에 기대지 않고,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주는 위계·관습을 거부하겠다는 의지이다. 자신이 세운 디자인학교 학생들이 날 수 있도록 날개를 달아준다는 뜻도 있다.
공식 인터뷰지만 역시 날개라는 호칭, 경어체가 아니라 편하게 말하자고 했다. 안상수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인터뷰 시작부터 느낄 수 있었다. 먼저 한글 자음과 민화를 조합한 그림, 문자도에 대한 해석부터 물었다. “미리 문자도 작품을 여러개 봤는데 어떤 글자일까 맞히기가 쉽지 않았다”는 기자의 인사에 거장은 슬쩍 웃는다.
“문자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문자는 늘 의미에 갇혀있는 게 아닐까. 문자를 이미지 그 자체로 봐주면 어때?” 글자를 읽고 해석하려고 하지 말고 직관적으로 이미지를 보며 느껴보라는 뜻이다. 형체가 명확하지 않은 추상화를 감각적으로 느끼듯, 문자도 역시 형체를 느끼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재미있게 즐길 수 있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에 평론을 쓴 조새미 평론가는 “‘홀려라’ 시리즈의 그림 형상은 감각 지각적 요소가 있다. 각각의 요소가 원래 특성을 보존하면서 서로 소통하고 교류한다. 통로 개념이다”라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에선 한글 자음 ‘ㅎ’을 활용한 문자도만 모았다. ‘ㅎ’에 여러 형상이 닿아 새롭고 자유로운 형태가 탄생했다. 꿈틀거리는 기운이 느껴지고, ‘ㅎ’에선 마치 웃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다. 이전보다 과감해진 해체와 조합은 이번 전시에서 보여주는 신작의 매력이다. 안상수 작가는 직접 물감을 만들어 사용하기 때문에 그만의 오묘한 색 표현 역시 작품의 매력이다. 거대한 붓질로 표현된 문자도는 강렬한 질감이 살아있다.
갤러리 한쪽 코너는 안상수 작가가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발행한 독립 디자인잡지 ‘보고서/보고서’의 원본이 있다. 2024년 현재 시각으로 봐도 놀라운 디자인 실험들이 담겨 있다. 이 귀한 잡지를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전시를 꼭 가야 할 이유가 된다.
갤러리 입구 쪽에 위치한 또 다른 갤러리인 스페이스 토핑에선 안상수 작가가 세운 디자인 대안학교 출신 젊은 작가의 작품을 모은 ‘모으기, 나열하기, 넘나들기’ 전시가 함께 진행되고 있다.
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