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대통령의 격노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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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노(激怒). 격렬하게 분노하다, 그러니까 몹시 화를 낸다는 뜻. 단어 자체에 벌써 거칠고 급박한 기세가 역력하다. 지난 2년 동안 윤석열 대통령과 관련된 보도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기도 하다. 물론 이는 언론 보도를 통해 접했을 뿐, 실제로 대통령이 그랬는지 확인할 길은 없다. 다만, 대통령의 언행을 묘사하는 이 말이 뉴스에 끊임없이 나온다는 게 문제다. 이쯤 되면 대통령이 자신의 사적 감정을 주변에 표나게 드러낸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격노 사례는 국민들에게 알려진 것만 살펴봐도 부지기수다. 윤 대통령은 이미 검찰에 있을 때부터 격노가 잦았다고 한다. 2020년 4월 당시 윤석열 검찰총장은 ‘검언유착’ 사건과 관련해 한동훈 검사장에 대한 감찰을 개시하겠다는 보고를 받고는 격노했다. 이 장면은 한동수 전 대검찰청 감찰부장의 저서에 자세히 서술돼 있다. 지난해 3월에는 윤 대통령의 미국 국빈 방문에 맞춰 블랙핑크 공연이 추진되다 무산된 적이 있는데, 이때도 대통령이 격노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실제로 국가안보실장의 교체로 이어졌다.

지난해 연말에도 격노설이 불거졌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 체제로 가기 직전에 당시 김기현 당 대표가 사퇴를 거부하자 윤 대통령이 격노했다는 것이다. 한동훈 비대위가 들어선 이후에는 김건희 여사 특검 문제가 거슬렸던 듯하다. 총선 이후 특검을 받는 조건부 방안에 대한 검토가 거론되자 이에 대해 대통령이 격노했다는 보도들이 나왔다.

그리고 해병대 채 상병 수사 외압 의혹 사건. 당시 박정훈 대령이 해당 사단장을 수사 대상으로 올렸고, 대통령이 이러면 누가 사단장을 하느냐면서 ‘VIP가 격노했다’는 보도가 쏟아졌다. 이 VIP 격노설은 지금 특검 정국의 향방을 가늠할 열쇠를 쥔 사안이다. 일각에 의하면, 지난 9일 기자회견 뒤에도 대통령이 격노하는 등 대통령실에 소란이 있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사적 감정의 표출은 국가 최고지도자의 덕목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왕조 시대에나 통하는 스타일이다. 특히 공적 영역에서 사적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리더십은 21세기 민주공화국에서 용납되기 힘들다. 물론 격노 자체가 나쁜 건 아니다. 화를 내야 할 때는 분명하게 내야 한다. 관건은 분노의 방향이다. 분노해야 하는 일에 분노하지 않고 분노할 이유가 없는 일에 분노한다면, 국가적으로 큰 불행이요 국민들에겐 최악의 모욕이다.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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