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외교관 이예
〈조선왕조실록〉에는 졸기(卒記)라고 부르는 부분이 있다. 사관이 망자에 대한 세간 혹은 자신의 평가를 서술한 것이다. 실록에 졸기가 실릴 정도면 대단히 출세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졸기의 인물평은 아주 박하다. 아무리 벼슬이 높다 하더라도 좀처럼 봐주지 않는다. 1445년(세종 27) 2월 23일 한 사람의 졸기는 그의 죽음을 고하며 그 일생을 조망한다. 내용 또한 칭찬 일색이다. 그 사람은 조선 최초의 전문 외교관 충숙공 이예(李藝·1373~1445)다.
‘이예는 울산군의 아전이었다’로 시작하는 졸기는 어려서 어머니를 잃은 일, 군수의 피랍사건, 벼슬 승진의 과정, 포로를 귀국시킨 정황 등을 소상히 밝히고 있다. 조선 초기 태조대에서 세종대까지 60여 년 동안 조선은 일본에 48차례 사절을 파견했다. 이예는 이 중 40여 차례나 현해탄을 건너 667명의 포로를 송환해 온 인물로 실록에 기록돼 있다. 포로 송환 문제는 왜구의 침략 문제와 더불어 조선 초 대일 외교의 주요 현안이었다. 70대 고령에도 외교관으로 일본에 가야 할 상황이 되자 세종이 손수 지팡이를 선물했다는 일화도 전한다.
조선 초기 이예는 계속되는 왜구 침입과 일본 사람들의 한반도 유입을 노련한 외교술로 막아냈다. 이에 힘입어 조선은 초기 정국 안정을 가져왔다. 뒤이어 일본과 통신사를 이어 가며 문화 교류를 한 차원 끌어올릴 수 있었다. 이예는 대마도주를 상대로 일본인의 조선 입국 허가와 관련한 문인(文引·증명서) 제도를 약정하고 일본과 계해약조를 체결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외교부는 이런 그의 업적을 기려 이예를 2010년 '우리 외교를 빛낸 인물'로 선정하기도 했다.
이예는 일본과 외교적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직접 일본 조정이나 유구(오키나와) 지역을 방문했다. 그의 흔적이 남아있는 일본 교토에 최근 그를 기리는 동상이 세워졌다. 조선과 일본의 관계 정상화에 기여한 ‘한일 우호의 상징’ 이예의 동상이 교토에 세워진 건 너무나 뜻깊은 일이다.
흔히 한 나라의 국력 성쇠는 그 나라 외교 수준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최근 라인 야후 사태에 한일 양국 정부가 개입해 자칫 외교 분쟁으로 번질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한일 관계가 좋아진 듯했다가 라인 야후 문제로 다시 경색되는 건 아닌지 우려된다. 지금 이 시대에 이예가 살아 있다면, 어떤 활동을 벌일까? 일본에 대해 잘 알고 잘 대처할 수 있는 이예 같은 전문가가 필요한 시점이다.
정달식 논설위원 dosol@busan.com
정달식 논설위원 dosol@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