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이중섭 문화거리
이중섭에게 부산은 아픈 역사다. ‘피란민의 원형’을 꼬리표처럼 달고 살아야 했고 가난 때문에 사랑하는 가족을 일본으로 떠나보내야 했던 곳이다. 하지만 궁핍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동시에 그의 예술 정신을 성장시켰다. 불운의 시대를 살다 간 천재 화가의 애환과 예술혼이 함께 깃든 공간이 부산이다. 그의 예술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부산에서의 삶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 이 때문이다. 부산이 한국 근현대미술을 대표하는 거장을 추억하고 기념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평안남도 평원 출신으로 북한에서 나고 자란 이중섭은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왔다. 1950년 12월 원산에서 배를 타고 부산에 도착한 후 1년간의 제주도 생활을 거쳐 1951년 12월 다시 부산에 정착한다. 그러나 그를 기다린 건 생활고였다. 동구 범일동 판잣집에서 피란 생활을 이어가며 생계를 위해 영도 대한도기에서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고 부두에서 막노동을 하기도 했다. 결국 1952년 6월 아내 마사코와 두 아들을 일본으로 보낸다. 일본 유학시절 만난 아내는 직접 현해탄을 건너와 그와 결혼하고 두 아들을 낳았다. 짧고 행복했던 결혼 생활을 뒤로하고 일본으로 돌아간 그녀는 재혼하지 않고 평생을 이중섭을 가슴에 품고 살다 2022년 101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이중섭은 가족과의 재회를 꿈꾸며 전시회도 열고 힘겹게 생활을 이어갔지만 결국 술에 빠져 건강을 잃고 정신분열 증세까지 보이다 1956년 서울 서대문적십자병원에서 무연고자로 생을 마감한다. 피란 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부산 제주 통영 진주 대구 서울 등지에서 살았지만 2년여의 가장 긴 시간을 부산에서 보냈다. 그런데 정작 부산에서의 작품은 많지 않다. 1953년 11월 발생한 부산역전 대화재로 그의 작품 대부분이 소실됐기 때문이다. 사라진 그림이 150여 점이었다고 하니 안타까운 일이다.
부산이 이중섭의 삶을 추억하기 시작한 건 2014년 산복도로 르네상스 도시재생을 통해서다. 범일동 범일할매국밥~희망길 100계단~이중섭 전망대로 이어지는 460m 구간을 ‘이중섭 문화거리’로 조성했다. 벽화를 그리고 흉상도 만들고 흰소 모형도 생겼지만 작가의 삶을 기념하기에는 부족했다. 제주도 이중섭 미술관·거리와도 비교됐다. 부산 동구청이 이중섭 문화거리 새 단장에 나선다고 한다. 갤러리를 새로 만들고 전망대도 리모델링한다는 계획이다. 이중섭을 부산에서 제대로 다시 만나고 조명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강윤경 논설위원 kyk93@busan.com
강윤경 논설위원 kyk93@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