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스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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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 소설가

누군지 모를 대다수 사람은
한 인자의 잘못에 대해
마치 충격을 흡수하는 스펀지처럼,
혹은 바람을 막는 방풍림처럼
인내하고 기다리는 역할을 했었다.

출근길에 늘 마주치는 승용차가 있다. 집 앞 도로를 벗어나 10분쯤 달리면 비상등을 켜놓고 정차해 있는 군청색 승용차를 만날 수 있다. 아마도 누군가를 태우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당사자들에겐 좋은 일일지 몰라도, 나로선 불편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다. 바쁜 출근 시간에, 그것도 4차로 도로 우회전 차로를 떡하니 막고 있으니 말이다.

그 차를 넘어 우회전하려 해도 왼쪽엔 직진 대기 중인 차량이 밀려 있다. 어쩔 수 없이 직진 차선에서 기다렸다가 신호가 바뀌면 다시 차선 변경을 해서 우회전해야 한다. 하지만 직진 신호가 켜지고 정확히 10초 후에 오른쪽의 건널목 신호등도 파란불로 바뀐다. 결국, 무조건 두 번의 신호를 기다려야 한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건널목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기 직전에 돌진하는 자전거가 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나타나는 것을 보면 그 50대 아주머니도 출근길이다. 산길의 고라니처럼 뛰어든 자전거는 순식간에 내 차 앞을 스쳐 지난다. 그 건널목엔 지금도 내가 떨어뜨린 심장 조각이 몇 개나 나뒹굴고 있을 것이다. 덕분에, 신호가 바뀌어도 길 건너에서 달려 오는 자전거가 있는지 살펴보는 소심한 인간이 되어버렸다.

이 모든 스트레스의 원인은 바로 그 군청색 승용차다. 이건,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나는 카오스 이론까지 연결 지으며 그 운전자의 행태를 성토했다. 흔히 ‘나비효과’라 일컫는 열대지방에 사는 나비의 날갯짓이 뉴욕에 허리케인을 불러올 수 있다는 이론 말이다. 사소한 문제가 어떤 참극의 씨앗이 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본인과 타인의 안전을 위해서 그 작자를 신고해야 한다. 하지만 회사 문을 들어서면 그 다짐을 까맣게 잊어버린다.

출근길마다 효과 없는 다짐만 하다가 문득 이런 의문이 생겼다. 그 차 때문에 불편을 겪는 이가 나뿐만이 아닐 텐데, 아무도 불편 신고를 하지 않았단 말인가? 적어도 10분 이상은 우회전 차로를 막고 있었을 텐데? 근데, 그 차는 6개월 동안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변함없이 정차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그게 더 신기했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이 누군가의 잘못에 대해 즉각적으로 대응하기보다는 인내하고 기다렸다는 의미가 아닌가. 나는 문득, 늘 존재했기에 알아채지 못했던 이 사회의 긍정적인 힘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그것은 어떤 잘못에 대해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과연 좋은 결과를 가져올까 하는 의구심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그 운전자의 행동이 괜찮다는 의미는 아니다. 안전불감증을 부추기는 말도 아니다. 다만, 그가 일으킨 부정적 영향을 누군가는 아무렇지 않게 뭉개주는 역할을 했다는 것에 주목했을 뿐이다. 완벽한 사람은 없지 않은가. 누구라도 부지불식간에 문제의 씨앗을 만들어낼 수 있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다. 그때마다 상응하는 반응이 일어난다면, 그것이야말로 카오스 이론처럼 태풍으로 연결되는 조건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누군지 모를 대다수 사람은 한 인자의 잘못에 대해 마치 충격을 흡수하는 스펀지처럼, 혹은 바람을 막는 방풍림처럼 인내하고 기다리는 역할을 했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의문이 든다. 우리는 그간 세상 모든 문제 인자에 대해 너무 과민하게 반응했던 건 아닐까. 따지고 보면 행동하는 모든 것은 사고를 유발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 그런 유발 인자에 대해 일일이 반응하는 것이야말로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는 건 아닐까?

열대지방에 사는 나비가 아무리 날갯짓을 해도 실제로는 뉴욕에 태풍이 일어나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이런 관용과 여유로움 덕분이 아닐까? 반목과 전쟁을 일상처럼 보고 듣는 요즘, 이런 생각을 한번 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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