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훈의 생각의 빛] ‘지역 문학’이 서야 할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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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부산 시 전문지 <신생> 발간 100호
지역에 기반, 글쓰기의 지평 확장
권위·관습 딛고 탈중심·쇄신 이끌어

지난 14일 영국 국왕 찰스 3세의 공식 초상화가 버킹엄궁에서 공개되었다. 왕비와 화가, 왕실 식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찰스 3세가 직접 장막을 걷어내자, 실물보다 큰 캔버스(268×198cm)에 그린 초상화가 드러났다. 왕이 입은 붉은 웨일스 근위대 제복이 온통 붉은색으로 칠해진 배경에 녹아 사라지듯 했고, 주름진 얼굴이 전면에 부각되어 있었다. 여기에 한 마리의 나비가 어깨에 내려앉을 듯이 그려져 있었다. 이 초상화에 대한 세간의 평을 차치하면, 근대에 접어들어 위엄이 사라지고 힘을 잃은 현실과 함께 전근대와 달리 권위나 지위를 드러내기보다 인간적인 개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변모된 초상화의 흐름을 확인하게 된다.

‘찬란했던’ 대영제국이 유럽에 속한 나라 중 그나마 국제적인 영향력을 무시하지 못하는 국가로 ‘전락’하기까지의 과정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근대 민족주의 국가의 탄생과 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냉전 이후 다원화된 국제질서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기존의 제국주의는 영향력을 잃어갔다. 한때 세계의 ‘중심’을 자처했던 영국에서 찰스 3세의 초상화 공개 이벤트가 진행된 것은 왕실의 전통 계승과 함께 상징적이나마 국왕 일가를 대우하는 영국 왕실의 오랜 관습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모든 것을 권위와 중심적 사고로 빨아들이면서 다양한 속성과 개성을 단일한 색채로 획일화했던 지난날의 ‘폭력적인 삶의 양식’은 지금 발붙이기 힘들게 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옛 권위와 힘을 빌려 행사하려거나 지난날의 영광을 그리워하는 향수병에 빠지기도 한다. 지역 분권주의와 민선 지방자치가 시행된 지 수십 년이 흐른 지금, 자연스럽게 문학판을 들여다보게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부산에서 발행하는 시 전문잡지 〈신생〉(도서출판 전망)이 올해 가을호 발간을 기점으로 통권 100호를 맞는다. 부산에서 변변한 시 전문잡지가 거의 없던 때에 창간하여 100호를 내기까지에는 부단한 갱신과 내부 편집진의 노고가 배었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생명과 생태 담론을 꾸준히 기획·조명하면서 우리 시대 생태 시의 깊이와 외연을 확장해 왔다는 세간의 평가를 받는 잡지다. 얼마 전에는 〈신생〉 발간 100호 기념 간담회가 중구 중앙동에 있는 신생연구소에서 열려 의미 있는 논의가 오고 갔다. 그리고 25일에는 기념 심포지엄도 예정되어 있다.

우리 사회 모든 분야가 그렇듯이 문학 또한 예외가 아니라서 수도권에 문인과 출판사가 집중되어 있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메이저급 출판사와 잡지에 작품이 실려 괜히 으스대고 싶은 마음이야 글 쓰는 이들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것이다. 1990년대 이후 이념 논쟁이 퇴색해지고 대중문화가 범람하면서 기존의 중앙 집중적인 문학판의 지형이 달라졌다. ‘지역 문학’이라는 새로운 이름이 널리 사용되면서 이제는 지역에 기반을 둔 문인과 출판사 및 잡지가 자생할 수 있는 여건과 분위기가 조성된 시점도 꽤 흘렀다. 질 높은 콘텐츠와 예산이 부족해서 너도나도 ‘서울 바라기’만 하고 있는 중에도 지역에서 꾸준히 의미 있는 담론과 작품 발굴에 매진해 온 〈신생〉의 100호 발간은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곳 부산에는 〈신생〉 말고도 〈시와 사상〉과 〈사이펀〉 등 몇몇 시 전문잡지를 발행하고 있다. 그리고 예전보다 훨씬 확대되고 다양해진 지역 시인들의 작품을 들여다볼 수 있는 매체로 자리매김했다. 아울러 이전처럼 자신이 거주하는 지역 말고도 여러 지역을 그리 긴 시간을 할애하지 않고서도 이동하면서 자신의 글쓰기 공간의 확장이 더욱 수월해졌다. 한편으로는 요즘에도 ‘지역’이란 수식어가 의미 있을까 궁금해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굳이 지역이라는 수식어를 붙이지 않아도 좋다고 나는 생각한다. 19세기 빅토리아 여왕이 제국을 막강한 경제력과 군사력으로 호령하던 시대, 영국 남서부 지역을 소재로 한 소설을 주로 써서 일약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오른 토머스 하디를 기억할 것이다. 빅토리아 체제의 도덕 관습을 신랄하게 비판한 〈테스〉는 그의 대표작이다. 그에게 지역이라는 장소는 창작을 방해하는 굴레가 아니라, 오히려 권위와 엄숙함으로 대변되는 ‘중심’을 발가벗기는 무대였다.

찰스 3세의 초상화에서 보듯 불타오르는 바다에 떠 있는 듯한 얼굴에서 오랜 권위가 주었던 체제와 관념이 녹아 없어지는 느낌이 생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역 문학은 날로 갱신하고 쇄신하면서 기존의 통념과 관습을 의심하고 반성하는 절호의 마당이요 공간이다. 이런 인식에서 지역 문학이 새롭게 우뚝 서게 될 날을 손꼽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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